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대통령은 아직도 소통을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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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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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자 입장에서 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첫 양자회담의 승자는 이 대표다. 이 대표는 퇴장하는 취재진을 붙잡아 두고 15분간에 걸쳐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전 국민 민생회복지원금 25만원을 주자고 했고, 채 상병 특검법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 수용도 요구했다. 잦은 거부권 행사에 대한 유감 표명도 요청했다.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가면 좋겠다”며 김건희 여사 문제도 거론했다.

회담에 앞서 혼자만 준비된 원고를 읽은 이 대표의 돌발 행동은 반칙에 가깝다. 그로선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의 발언 영상은 인터넷에 그대로 남았고, 지지자들은 “역시 이재명”이라며 열광하고 있다.

영수 회담 정치 복원 지켜볼 일
윤 대통령, 의혹에 더 솔직해야
국민 지지가 여소야대 정국 해법

문제는 윤 대통령 쪽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언론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비공개 회담에선 윤 대통령과 이 대표 발언량 비율이 85대15라고 한다. 발언 중 극히 일부만 배석자들의 전언을 통해 알려졌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국정 현안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국민에게 전달되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이 대표는 그걸 극대화했고, 윤 대통령은 그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가령 민생회복지원금만 해도 왜 전 국민 지원금이 민생에 도리어 독이 되는지 국민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벌써 지난해 나랏빚이 국내총생산(GDP)의 50%를 넘어섰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국가채무가 늘고 있는 나라에 속한다. 물가도 물가지만 정부가 빚을 내 현금을 나눠준다고 경제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형편도 안 된다. 그러나 알려진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더 크게 지원하자는 얘기가 있었지만 재정이나 인플레이션이 우려되기 때문에 내가 단칼에 잘랐다”는 발언 정도가 눈길을 끌었다. 민생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야당 대표의 청을 대통령이 박절하게 물리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채 상병 특검과 김 여사 문제는 본회담에서 다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필요한 사안들이었다. 민주당이 특검법 처리를 벼르고 있지 않나. 사실 4·10 총선에서 민심이 분노한 대목 중 하나는 윤 정부에서 국민 상식과 어긋나는 일이 잇따른다는 점, 그런데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었다. 채 상병 사건의 피의자 신분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내보낸 것,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도 그중 일부였다. 국민의 궁금증과 의구심은 이번에도 해소되지 못했다.

국민연금 논의는 특히 아쉬운 대목이다. 이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처리 독려를 요청한 것은 국회 연금개혁특위 공론화위원회의 ‘소득대체율 50%, 보험료 13%’ 안이다. 소득 보장 강화라는 장점이 있지만, 2093년 누적 적자가 702조원 증가하는 등 미래 세대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상당수 전문가로부터 ‘개악’이란 비판을 받는 내용이다. 보건복지부도 지속 가능성을 우려한다. 찬반이 맞서는 만큼 이번 회담이 절충점을 찾는 자리가 돼야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미래 세대의 짐을 줄여주는 쪽으로 수정·보완하자고 이 대표를 설득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간은 없는데 귀한 찬스가 날아갔다.

윤-이 회담이 정치 복원의 계기가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일단 1일 첫 성과가 나왔다. 여야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수정해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양보와 타협의 결과다. 그러나 법안 강행 처리와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되풀이되면 정치는 다시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다.

어쨌든 윤 대통령 앞에는 험로가 기다리고 있다. 거대 야당(민주당 175석, 야권 전체 192석)이라는 22대 국회의 현실은 윤 대통령의 많은 구상을 좌절시킬 것이다. 길이 없지는 않다. 여소야대든, 여대야소든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결국 국민 지지에서 나온다. 진심을 다해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윤 정권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