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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 싹둑 자른 '모단걸' 여성해방 신호탄 쏘아 올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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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호 15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1920년대 단발 여성의 출현

1924년 개벽사에서 만든 잡지 『신여성』의 창간 1주년 기념호 표지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의 모습. [사진 최용신기념관]

1924년 개벽사에서 만든 잡지 『신여성』의 창간 1주년 기념호 표지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의 모습. [사진 최용신기념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정해진 기간마다 머리를 손질하는 일은 상례에 해당하겠으나, 정도 이상의 머리카락을 갑자기 잘라낸다는 것은 굳은 결심을 드러내거나 어떤 사태에 개입 혹은 단절을 선언하기 위한 방법인 경우가 많다. 목표를 향해 정진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애달픈 이별을 겪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속세를 떠나 세상과 절연하기 위해. 이렇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머리카락을 기꺼이 자른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보통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돼 이뤄지는 일들이다.

염상섭 등 당대 남성 지식인들 혹평

머리를 자르는 행위가 사회적 의미를 크게 지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20년대 여성의 ‘단발(斷髮)’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단발을 한 여성은 강향란으로 알려져 있다. 강향란은 한남권번 기생 출신 여학생으로 1922년 6월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나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강향란의 단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한 신문 기사(단발낭(斷髮娘), 동아일보, 1922년 6월 22일)에 따르면, 강향란의 단발에는 ‘실연의 극복’과 ‘새출발’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버림받은 강향란은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다지며 단발을 실행한 셈이다. 단발 이후 강향란의 행보는 더욱 파격적이었다. 남성 복식을 차려입고 종로구 누하동에 있는 배화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고, 나중에는 상하이와 도쿄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강향란은 단발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가장 대담하고 앞서가는 사회적 인물이 됐다.

1936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발행한 팸플릿(위)과 조선일보에서 만든 잡지 『여성』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6년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발행한 팸플릿(위)과 조선일보에서 만든 잡지 『여성』에 실린 단발머리 여성. [사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강향란 이전에 단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찍이 구한말 남성 개화주의자들의 단발 시도가 있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남성들의 머리와 복식은 서양식을 따르는 경우가 제법 흔했지만, 단발한 여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긴 머리만큼은 절대 불변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남성의 단발은 개화를 향한 의지와 모던한 취향으로 인정받았지만, 여성의 단발은 전통의 파괴, 도덕의 거부, 서구화에 대한 무모한 추종으로 폄하됐다.

강향란을 향해 남성 지식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종로 출신의 작가 염상섭은 강향란의 단발을 두고 “취미성의 열화라든지 사상적 중독이라든지, 일종의 허위적 심리”가 반영된 행위이며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무견식하고 그릇된 행동”(여자단발문제와 그에 관련하여, 『신생활』, 1922년 8월)이라고 거칠게 비판하기도 했다. 문단 구습과 사회 패악에 적극 맞섰던 작가 염상섭의 여성 단발에 대한 생각조차 이럴진대, 다른 남성 지식인들의 태도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강향란의 최초 단발은 따가운 시선을 이겨낸 용기의 발현이자 담대한 문화적 실천이었다.

강향란 이후 여성의 단발 소동으로 또 유명했던 사건이 바로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의 ‘공개 단발’이다. 1925년 8월 22일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청계천에 단발을 한 젊은 여성 세 사람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종로의 조선여성동우회관에서 이제 막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내고 나온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였다. 셋은 사람들의 마뜩찮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을 걷어 올리고 유유자적 탁족을 즐겼다. 여성이 종아리를 드러내놓고 물놀이를 하는 모습도 생소한데, 모두 하나같이 단발을 하고 나타났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들의 공개 단발 소식은 종로를 넘어 경성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깎기로 언약하고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結髮)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낭자 송락(松絡) 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 기뻤습니다.”(허정숙,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신여성』, 1925년 10월호)

1920년대 여성이 단발을 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모던걸(modern girl)’을 단발과 엮어 음차해 ‘모단(毛斷)걸’로 부를 정도로 여성이 자발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행위는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를 받아들여 신여성으로 존재의 변화를 감행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었다. 물론 과감하게 단발한 신여성들은 세상으로부터 쉽게 환영받지 못했다. ‘모던걸’이 ‘모단걸’이 되었다가, “못된 걸”에서 “못된 년”으로까지 지칭하는 방식이 격하되는 등 단발 여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갑다 못해 가혹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과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단발은 유행처럼 번졌다. 신여성이라면 혹은 여성해방운동가라면 단발은 응당 필수적인 의례였다. 종로의 거리는 물론 경성 전역에 단발 여성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여성이 단발을 하는 표면적 이유는 “거뜬하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시원하고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단발은 실용적 목적 외에도 더 많은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가부장제 하의 사회제도, 관습, 도덕 등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재래의 인습에 대한 저항”이나 “여성해방의 유일한 조건”으로 단발을 꼽은 여성운동가들이 많았다.

여성운동가 최대의 사회적 퍼포먼스

1925년 여름 단발을 한 뒤 청계천에서 탁족을 즐기는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 왼쪽부터 허정숙·주세죽·고명자. [사진 위키백과]

1925년 여름 단발을 한 뒤 청계천에서 탁족을 즐기는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 왼쪽부터 허정숙·주세죽·고명자. [사진 위키백과]

하지만 여성의 단발을 그저 흥미로운 볼거리 정도로 격하하거나, 여전히 못마땅해 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여전했다. 견고한 가부장 전통 하에서 억압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여성들은 단발을 꿈꾸거나 실행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 단발이 꾸준하게 확산되거나, 보편적인 스타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종로 거리와 이화· 숙명·배화 같은 학교에서는 종종 목격됐지만, 경성 전체를 보더라도 단발보다 긴 머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단발 여성을 더욱 특별하고 앞서가게 보이게 하는 효과로 작용했다. 이렇듯 1920년대 단발은 급진적 여성운동의 상징이었다.

여성 단발은 낙후된 여성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여성이 제 스스로 긴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잘라버리는 행위는 전근대적인 면모가 짙게 남아있던 식민지 조선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됐다. 서양의 다양한 근대문화 중에서도 단발을 가장 먼저 수용한 이유는 시각적 파격성 때문이기도 했다. 전통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 여성의 긴 머리카락이 한 순간에 사라진 모습을 본 당시 남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단발은 세계의 변화에 따른 문화적 전환의 요구를 여성의 몸으로 구현한 최초의 근대적 행위였다. 단발은 오랫동안 억압된 조선 여성들이 근대적 세계와 단숨에 접속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행동이었다. 즉, 1920년대의 단발은 굳건한 조선의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해방을 모색하던 여성운동가들이 수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회적 퍼포먼스였다.

1920년대 여성 단발은 패션이라기보다 혁명 그 자체였다. 당시 신여성들은 단발 의식을 벌일 때 받은 사회적 주목을 여성해방의 자원으로 삼으려 했다. 당대의 신여성들에게 단발은 사회변혁을 이끌어내겠다는 당당한 외침이었다. 단발 의식을 통해 근대 여성의 사명과 목표는 훨씬 강력하게 동시대의 여성들에게 전파되고 공유됐다. 많은 여성 사회운동가들이 단발 행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냈다. 여성 단발은 전근대적 유교 풍습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 신여성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였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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