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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선데이] 차 한 잔 하시지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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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호 29면

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풀꽃문학관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차 대접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제도 풀꽃문학관 큰방에서 약속된 손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마루 쪽에서 두런두런 몇 사람이 와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밖을 향해 말했다. 누구신지 몰라도 안으로 들어와 차 한 잔 하시지요.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젊은 남녀 두 사람이었다. 앉으세요. 앉아서 차 한 잔 하세요.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면서 자기들 소개를 했다. 저희는 선생님 공주교대 부설초등학교 제자들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름이 누구신가? 네, 저는 윤석현이고요 이쪽은 제 동생 윤석영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혹시 가정약국집 아들 윤석현 아닌가? 네, 제가 바로 윤석현입니다. 그러면 미국서 하버드대학 교수한다는? 네, 제가 그 윤석현입니다.

우연히 만난 초등교사 시절 제자
하버드대 교수로 번듯하게 성장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해줘 감사
다시 보자는 약속 없어도 흐뭇

ON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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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계는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간다. 내가 공주교대 부설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은 30대 중반. 5년 동안 근무했는데 그 기간에 두 사람과 인연이 있었던가 보다. 동생 쪽은 몰라도 오빠 쪽은 나의 기억에도 분명히 있다. 1980년도 내가 3학년 담임했을 때 학생 같았다. 조그만 체구에 눈이 유난히 크고 공부를 아주 잘하는 어린이였다.

공주 지역에서는 가장 좋은 집안이었다. 그 집안의 큰아들 윤석현이 공부를 잘해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말은 나도 풍문으로 들은 바 있다. 어쩌면 꿈같은 이야기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잊어버렸지 싶다. 그런데 그 장본인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놀라운 일이네. 어떻게 하버드대학 교수가 다 되었나? 네, 저는 의과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조가 여간 조신(操身)한 게 아니다. 똑바로 얼굴을 보니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동안(童顔)에다가 안경 너머 눈빛이 맑고도 깊다. 그래 저 사람 초등학교 아이 시절에도 안경을 쓰고 있었고 늘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

그래. 그런데 나는 학교 선생 할 때 이야기만 하면 부끄러워지네. 자랑스런 선생이 못되었거든. 겨우겨우 선생을 했으니까. 그러자 여동생이 이야기를 거들고 나섰다. 왜요, 선생님?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그래? 그렇지 않았을 거야. 아니에요.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셨어요. 더러 이렇게 말하는 옛날 제자를 만나면 더욱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몸이 오그라든다.

내가 좋은 선생이었다는 여동생 쪽의 설명은 이렇다. 내가 그 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자기가 나의 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다른 교실로 옮겨 특별한 공부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자기는 그곳에 가지 않고 혼자 남았다가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쫀드기라는 군것질감을 사서 먹었는데 내가 그것을 보고서도 혼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그다음 날 1학년 반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었다고 한다. 교실에 연탄난로를 피우던 겨울철이었는데 내가 집에서 고구마 한 포대를 가져다가 난로에 구워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다음 날은 땅콩도 가져다가 구워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장년이 된 뒤에도 오래 잊혀지지 않고 내가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그랬던가? 나는 여동생 쪽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오빠 쪽이 말했다. 실은 며칠 전 아버지께서 소천하시어 본가에 들렀다가 어린 시절 살았던 공주를 찾은 것입니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들의 오늘 공주 방문은 추억 여행일 텐데 내가 약속이 있어 문학관에 나와 있던 것은 잘한 일이고 또 약속 없는 방문객으로 문학관을 찾은 남매에게 들어와 차 한 잔 하라고 권한 일은 더욱 잘한 일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는 남매를 향해 내가 물었다. 그래 미국 어디 어디에서 사나? 네, 저는 버지니아에서 살고 오빠는 보스턴에서 삽니다. 아, 그래. 버지니아 울프 하는 그 버지니아, 서윤복 선수의 마라톤 대회 보스턴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잘들 가시게. 가서는 지금처럼 잘들 사시게. 우리는 다시금 만나자는 그 어떠한 약속이나 인사말도 없이 담백하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래도 마음은 가뿐하고 좋았다.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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