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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중증 진단만 받아도 ‘연명의료계획서’ 작성 가능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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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벼락치기 존엄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2023년 4월 3일자 중앙일보 1면.

‘벼락치기 존엄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2023년 4월 3일자 중앙일보 1면.

임종 직전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하거나 가족이 결정하는 소위 ‘벼락치기 존엄사’가 줄어들 전망이다. 보건복지부는 2일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를 열어 제2차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2024~2028)을 심의·의결했다. 복지부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는 시기를 말기 환자에서 이전 단계로 앞당기기로 했다. 연명의료계획서는 의사와 환자가 협의해 심폐소생술·혈액투석·수혈·체외생명유지술(ECLS), 항암제·혈압상승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한 문서다. 환자가 주로 건강할 때 작성하는 사전연명의료계획서와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말기 환자는 일상적인 의미의 말기와 다르다.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내 사망할 것으로 예상돼야 하며, 의사 2명이 말기 여부를 판단한다.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서 진정한 의미의 존엄사를 가로막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보건복지부 윤병철 생명윤리정책과장은 “말기 진단을 받기 전이라도 본인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때 계획서를 미리 작성하도록 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말기 상태가 돼 의식이 혼미하거나 없는 경우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없다. 암이나 중증질환 진단을 받았을 때 작성할 수 있게 되면 훨씬 많은 환자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정부는 연명의료 중단 이행 시기를 앞당기는 문제를 두고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금은 임종기에만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다. 임종기는 회생 가능성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해 사망이 임박한 상태를 말한다. 말기 환자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연명의료 중단 이행 시점을 말기로 당기자는 의견을 제시해 왔다.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하기 힘든 데다 이렇게 구분하는 나라도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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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기로 못 박다 보니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한 날에 숨지거나 며칠 내 숨지는 ‘벼락치기 존엄사’가 횡행한다. 2018~2022년 연명의료계획서를 활용해 존엄사를 이행하고 세상을 떠난 8만3532명 중 5만4796명(66%)이 이 서류 서명 당일에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런 서류마저 없으면 가족 두 명이 “어머니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환자의 뜻을 간접적으로 확인하거나 당사자의 의사를 모를 경우 가족 전원이 합의해 연명의료를 중단(유보)하는 게 관행이 됐다. 이런 사람까지 포함하면 존엄사 이행자의 83%가 벼락치기로 연명의료를 중단했다. 이렇게 숨지면 가족에게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떠난다.

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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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혜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교수는 “의료인이 자신의 환자를 진료하다 적절한 시점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권고하는 게 적절한데, 지금은 말기 환자로 묶여 있어서 불가능했다. 작성 시기를 앞당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연명의료 중단 이행 시기가 임종기로 한정돼 있는데, 이를 말기로 당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종교계 등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환자의 의사를 알 수 없고 연명의료 중단 결정권이 있는 가족(직계 존비속과 형제)이 없는 경우에도 중단할 수 있게 보완할 예정이다. 의료기관 윤리위원회에서 결정하는 등의 대안을 두고 논의한다. 유 교수는 “윤리위원회의 권한이 커지는 만큼 위원 자격 강화 등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대리인 결정 허용 여부도 포함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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