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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벌죠" IT청년의 귀어…대기업 때려치고 양미리 잡는다, 왜 [바다로 간 회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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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달 19일 강원도 강릉 주문진항에서 만난 아이티호 선장 권세만(41)씨. 박진호 기자

지난달 19일 강원도 강릉 주문진항에서 만난 아이티호 선장 권세만(41)씨. 박진호 기자

강원 강릉시 주문진항에서 4.61t급 어선(아이티호)을 모는 권세만(41)씨. 3년 차 귀어(歸漁) '청년'인 그는 매일 새벽 4시 아이티호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지난달 19일 오전 6시쯤 주문진항에서 만난 권씨는 “주로 잡는 어종은 양미리인 데 요즘 제철이 아니어서 돌삼치와 도다리·도치 등을 잡는다"라고 말했다.

[바다로 간 회사원]

소프트웨어 개발자답게 배 이름 ‘아이티호’

부산이 고향인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11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3년 가까이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근무하던 그는 IT 성지로 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싶어 2014년 사직했다.

아마추어 배구 선수로 활동했다가 귀어한 용정우(30·가운데)씨가 전남 해남 전복 양식장에서 전복 이물질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황희규 기자

아마추어 배구 선수로 활동했다가 귀어한 용정우(30·가운데)씨가 전남 해남 전복 양식장에서 전복 이물질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황희규 기자

실리콘밸리에서 권씨는 ‘해커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커톤은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이 결합한 말로 IT 개발자가 주어진 시간 내에 과제를 해결하는 대회를 말한다.

실리콘밸리서 전 세계 개발자와 ‘해커톤’ 

권씨는 2015년 한국으로 돌아와 앱 개발회사를 창업했다. 앱 개발 의뢰가 끊임없이 들어왔고 돈도 제법 벌었다. 하지만 어느 날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직업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씨는 “번아웃이 온 것 같아 움직이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권씨는 한동안 처가가 있는 강릉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평소 낚시를 좋아하던 그는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강원귀어학교’를 알게 됐다. 2021년 10월부터 귀어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권씨는 어업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그리곤 2022년 3월 아예 강릉으로 이사와 어선을 장만했다. 이를 위해 개인 돈과 정부 지원금 등 4억원을 썼다고 했다. 권씨는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는데 지난해 주력 어종인 양미리가 많이 잡히면서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에서 살다 충남 보령으로 귀어한 박성호씨가 대천항애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신진호 기자

서울에서 살다 충남 보령으로 귀어한 박성호씨가 대천항애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신진호 기자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권씨는 양미리 등 각종 수산물 생산으로 지난해 1억5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권씨는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라며 "오늘 물고기 못 잡아도 내일 많이 잡으면 되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양미리 많이 잡은 날 하루 4t 달해

김영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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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전 12시쯤 경남 사천시 서포면 중촌항에서 귀어 1년차 신병행(47·오른쪽)씨와 동갑내기 귀어 멘토 서성주(47)씨가 어선 '천궁호'를 점검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안대훈 기자

지난달 28일 오전 12시쯤 경남 사천시 서포면 중촌항에서 귀어 1년차 신병행(47·오른쪽)씨와 동갑내기 귀어 멘토 서성주(47)씨가 어선 '천궁호'를 점검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안대훈 기자

귀어 인구가 늘고 있다. 한동안 농촌으로 내려가 삶의 터전을 일구는 귀농이 붐을 이루다 최근 바다에 관심을 갖는 도시인이 증가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등에 따르면 귀어는 귀농보다 장점이 많다고 한다. 귀농은 농사지을 땅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귀어는 몸만 가면 된다. 교육만 받으면 선원으로 일하거나 해산물 채취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다. 또 정부 정책자금(최대 3억7500만원)을 받아 어선을 구할 수도 있다. 귀어 후 선원으로 일하면 연간 6000만~7000만원, 어선이 있으면 1억원 정도를 벌 수 있다고 한다.

2022년 한 해 동안 귀어한 인구 ‘1023명’ 

해양수산부가 지난해 6월 발표한 ‘2022년 귀어인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귀어를 선택한 사람은 1023명이다. 이 가운데 남성이 672명, 여성이 351명이다. 연령대별로는 30대 이하가 134명, 40대 197명, 50대 332명, 60대 305명, 70대 이상 55명 순이다. 시·군별 귀어인 규모가 가장 큰 5개 지역은 충남 태안군 195명, 전남 신안군 80명, 충남 보령시 68명, 전남 여수시 62명, 전북 부안군 55명 순으로 나타났다.

연도별로 보면 2013년 690명이던 귀어인은 2014년 978명으로 대폭 증가하더니 2015년 1073명으로 1000명 선을 돌파했다. 이후 2016년 1005명, 2017년 991명, 2018년 986명, 2019년 959명, 2020년 967명 등 1000명 안팎을 유지해왔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엔 200명 이상 급증하면서 1216명에 달하는 등 정점을 찍었다. 매년 1000여명이 은퇴와 귀향 등 다양한 이유로 귀어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귀어인까지 포함하면 실제 규모는 수천 명에 이른다는 것이 해수부 설명이다.

6년 전 고향인 충남 태안 고남면 가경주마을로 귀어한 편도관씨가 마을 주민들에게 어촌활성화 교육을 하고 있다. [사진 편도관씨]

6년 전 고향인 충남 태안 고남면 가경주마을로 귀어한 편도관씨가 마을 주민들에게 어촌활성화 교육을 하고 있다. [사진 편도관씨]

귀어 인구 증가하는 데는 전국 곳곳의 어촌계(漁村契)가 진입장벽을 낮춘 것도 한몫하고 있다. 어촌계는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로 어촌 인구가 급감하자 외지인에게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다. 일정 기간 거주와 어촌계 가입비를 없애는 방식이다. 가입비는 어촌계별로 차이는 있지만 많게는 수천만원에 달한다. 어촌계는 어민들이 공동 어로 작업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공동체다.

하지만 귀어를 경험한 이들은 어업이 숙달되기 전까진 고정 수익을 낼 수 있는 다른 일을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실제 2022년 귀어한 1023명 가운데 32%(326명)는 겸업을 하고 있다.

귀어 선배들 어업 숙달되기 전까지 겸업 필수 

권세만씨는 “노하우를 쌓는데 보통 3~5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 기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부업이 꼭 필요하다”며 “어촌 삶에 적응하고 수익을 창출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수부는 지난해부터 어촌신활력증진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부터 5년간 전국 어촌계 등 300곳을 선정, 총 3조원을 투자해 어촌을 활력 넘치는 공간으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어촌 경제와 어촌생활플랫폼 조성, 어촌 안전인프라 개선 등이 핵심이다. 강도형 해수부 장관은 “어촌신활력증진 사업이 어촌에 활력을 불어넣는 핵심 사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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