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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동생, 왜 형 회사 샀나…그가 노린 건 ‘블랙핑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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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탄만 수천억’ 손태장 회장 벤처투자 신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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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가자.” 손태장(52·일본명 손 다이조) 미슬토 회장의 말이다. 그에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손정의(67) 소프트뱅크 회장의 막내동생이란 꼬리표다.  손태장 회장이 초등학생 시절, 15세 많은 형 손정의 회장은 이미 억만장자였다. 하지만 동생도 만만치 않다. 손태장 회장 역시 성공한 글로벌 창업가·투자자다. 1995년 23세 나이로 야후재팬 설립에 참여하며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98년 게임사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를 창업했고 2005년 일본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그의 투자 세계를 들여보면 글로벌 벤처캐피털(VC)에서 투자의 법칙이 보인다.

손태장 미슬토 회장. 우상조 기자

손태장 미슬토 회장. 우상조 기자

손태장 회장은 2013년부터 미슬토를 설립해 글로벌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10여년간 직간접적으로 투자한 스타트업만 270여 개. 투자 규모는 1조원에 이른다. 그런 그가 지난해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현 SBVA)를 인수했다. SBVA는 운용자산 규모(AUM)가 2조5000억원에 이르는 국내 3위 VC다. 형이 한국의 대표 벤처캐피털(VC)로 성장시킨 회사를 이어받았다. VC업계에선 매각 배경을 두고 소프트뱅크 비전펀드 실적이 부진해서 동생에게 넘긴 것 아니냐는 해석이 많았다.

지난달 6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난 손 회장은 이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전날 방한한 손 회장은 30분 단위로 짜인 촘촘한 업무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에게 SBVA 인수 이유와 한국 VC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물었다. 인터뷰는 1시간 30분간 일본어로 진행됐다. 그는 가끔 한국어를 했다.

1. ‘인맥 의존’ 투자 안 통해…AI투자플랫폼 연내 공개 

◆SBVA 인수 진짜 이유는=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는 이달 1일부터 SBVA로 사명을 바꿨다. SBVA의 인수 주체는 디에지오브(The Edgeof)로, 손태장 회장과 이준표 SBVA 대표, 다이라 아쓰시 미슬토 경영책임자가 공동 창업했다.

우선 비전펀드의 부진과 연결하는 소문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소프트뱅크 그룹의 비전펀드는 원래 프리IPO(상장 전 자금유치) 단계 투자에 주력했다. 그런데 투자 영역을 얼리 스테이지(초기 단계) 스타트업까지 확장하면서 SBVA와 사업 영역 일부가 겹치게 됐다. 그룹에선 이해 상충 문제를 우려했다. 예컨대 비전펀드가 투자한 스타트업을 SBVA가 투자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금을 대준 출자자(LP) 입장에선 크게 성공했는데 투자를 안 했다면 불이익을 당했다고 느낄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룹에선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큰 이슈라고 생각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중앙포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중앙포토

개인적으로는 엔젤 투자자(초기 스타트업 투자자)로서 한계에 부딪혔다. 스타트업을 더 지원하고 싶은데, 개인 자금만으로는 추가 투자에 한계가 있었다. VC를 새로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그룹의 고민을 알게 됐다. 이후 SBVA 인수 관련 경쟁에서 이겨 인수할 수 있었다. 형인 손정의 회장에게 ‘제게 주세요’해서 인수한 게 전혀 아니다.

SBVA는 인공지능(AI) 투자 플랫폼을 통해 한국 스타트업을 전 세계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AI가 벤처 투자 방식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란 판단에 따른 것이다. 지금까지 VC는 LP로부터 펀드 기금을 확보한 다음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하고 거기서 오는 수익을 돌려주는 형태로 운영됐다. 수익률을 높이려면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까진 인맥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이 시스템만으론 투자자도, 창업자도 정보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SBVA의 인수 주체인 디에지오브는 이런 전통적 투자 생태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AI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2. AI가 유망 벤처 뽑아주면 사람은 시너지 방안 고민

◆AI, 심사역을 프로듀서로 만든다=손 회장이 언급한 AI 투자 플랫폼은 국내에선 생소한 개념이다. 미국과 유럽 VC에선 AI를 활용해 초기 성장 기업을 찾는 시도가 일부가 있었지만, 여전히 인적 네트워크가 투자 성패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숫자만으론 성장 가능성을 전부 파악하기 어려워서다. 인간 심사역들의 뜻밖의 ‘촉’이 성공적인 투자 결과를 만들어 낸 사례도 적지 않다. 손 회장에게 구체적으로 AI가 산업과 일상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자신의 맥북을 꺼내 오래된 뉴욕 번화가의 사진을 보여줬다.

1900년대 뉴욕 번화가의 사진이다. 길에는 대부분 마차가 있고 자동차는 한 대뿐이다. 그런데 13년 뒤 같은 장소 사진을 보면 대부분 자동차이고, 마차가 오히려 한 대밖에 없다. 10여 년 만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100년 주기로 한 번씩 일어날 수 있다. 단순히 자동차만 많이 팔린다고 되는 게 아니고, 도로 정비와 신호 체계, 도로교통법과 주유소 등 그에 수반되는 인프라가 모두 한꺼번에 바뀌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변화다. 나는 AI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5년 안에 도시의 풍경과 우리 생활 방식을 모두 바꾸게 될 거다. 생각보다 빠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갖고 있는 상식을 모두 버려야 한다.

스타트업 투자자 입장에서 100개 후보군과 1만 개 후보군 중 어느 쪽에서 골라 투자하는 게 나을까. 당연히 1만 개 중에 찾는 게 성공확률이 높다. 인간이 AI보다 1만 개 회사를 더 빨리 보고 분석할 수는 없다. 인간이 굉장히 노력해 그 1만 개를 분석한다고 해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스타트업의 상황을 바로 따라잡을 순 없다. AI 플랫폼 개발이 마무리되면 향후 오픈소스로도 제공할 예정이다.

VC 심사역도 역할이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단순 심사는 AI가 대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사역은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기업을 묶어서 성장시키고 조율하는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전문성이 더 필요해진다.

3. K스타트업들 세계로 가야… 블핑 같은 빅스타 만들 것

◆K스타트업 “블랙핑크가 돼야”=손 회장은 지난해 일본에서 발간해 10만 부 이상 판매된 『모험의 서(冒険の書)』에서 ‘AI시대에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답을 ‘주도성’이라고 했다. AI 시대엔 우리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일이 무의미해질 수 있어 우리가 좋아하는 걸 찾아 몰두하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한국 창업자들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AI 시대, K스타트업은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그에게 한국 스타트업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손 회장은 미소를 띠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힘줘 말했다. “세계로 가자!”

한국 스타트업에 특별히 전달하고 싶은 강한 메시지가 있다. 세계로 가야 한다. 각국 정부는 이유가 있으니까 규제를 한다. 한국 안에서만 살아남고자 하는 기업들은 그 규제가 문제겠지만, 세계 시장에 나가려는 기업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규제는 한국 안에만 있다. 작은 한국 시장에 매달리지 말고 해외로 나가려는 의지를 갖춰야 한다. K팝의 인기가 대단하지 않나. K스타트업도 블랙핑크 같은 글로벌 빅스타(big Star)로 만들어보고 싶다.

세계인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세계에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즉 좋은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아이디어를 AI 기술을 이용해 사업화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단기간 시장에서 잘 팔릴 것 같은 상품과 서비스에 집중하는 건 앞으로 통하지 않는다. SBVA가 투자한 기업 중 ‘루닛’이란 회사가 있다. CT 영상 이미지 등을 AI로 분석해 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적합한 치료법을 제공할 수 있는 회사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AI를 만들었다. 루닛처럼 좁은 시장에 갇히지 않고 범용성이 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목표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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