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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경제 이끄는 「재계의 대부」 전경련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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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유창순 회장의 임기가 내년 2월로 끝나게됨에 따라 후임회장 선출문제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이 망라된, 재계 총 본산으로서의 전경련을 대표하는 회장은 「재계총리」로 비유될 만큼 비중이 크다. 5·16직후인 지난 61년 발족돼 내년으로 30주년을 맞게되는 전경련의 발자취는 한국 경제발전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3공 이후 공업화 과정에 내려진 「국가경제의 눈부신 발전」 「정경유착에 따른 부문별 격차심화」등 양면적인 평가는 전경련에 대해서도 동시에 가능하다. 전경련은 민간경제를 대표, 지난 한 세대 동안 경제성장과정에서 실질적인 주역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전체적 성장과 부문별 조화의 두가지 과제를 함께 맞고 있는 우리 경제에 있어 전경련이 담당할 역할은 지대하며 전경련은 이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해야할 시대적 소임이 있다. 역대 회장들이 남긴 발자취를 돌이켜봄으로써 전경련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명해 본다.
전경련은 창립이후 유 회장까지 19대로 이어져왔으나 회장은 도중에 연임이 많아 모두 7명이 역임했다.
전경련의 초대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회장(1910∼1987).
고 이 회장은 개인적으로도 국내 최대규모의 기업을 일궈냈지만 재계의 구심점이 된 전경련의 산파역을 맡았다.
1년 남짓 재임 기간 중 제조업의 성장을 통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모형을 제시하고 스스로 실천에 옮겨 불모지대나 다름없던 한국의 산업이 오늘의 고도성장을 이룩하는데 기초를 다졌다.

<첫 사업은 외자도입>
전경련의 창립 배경에는 혁명 주체 세력과 재계와의 갈등이 담긴 일화가 있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5·16직후 굴지의 기업인들을 모두 부정 축재자로 잡아 감옥에 가두었고 동경에 체류 중이던 이 회장도 귀국과 동시에 서울명동의 한 호텔에 연금 됐다.
며칠 뒤 이 회장은 박 의장에게 불려가 경제 재건방향을 놓고 담판을 짓게된다.
『사회혼란의 근본원인은 우리나라가 가난하기 때문이며 이를 퇴치하려면 경제가 부흥돼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득요지였다.
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시간이 3시간을 넘긴 뒤 박 의장은 『속시원한 해답을 얻었다』고 결론을 내렸고 며칠 뒤 구속됐던 기업인들이 모두 풀려났다.
이때 군사정부의 주문에 따라 13인의 기업인이 모여 만든 것이 바로 전경련(당시 이름은 한국경제인협회)이었다.
전경련의 첫 사업은 외자도입추진. 공장을 짓고 생산시설을 갖추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회장이 단장이 됐던 61년11월의 대미민간사절단 파견은 민간경제외교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같은 해 12월에는 재일 동포 실업인 65명을 초청, 기술이전 및 투자 유치를 추진했고 현재의 코오롱 그룹도 이때 일본에서 삼경 물산을 운영하던 이원만 회장이 국내에 나일론제조 공장을 세웠던 것이 모태가 됐다.
한국공업발전의 상징이 된 울산공업단지도 이 회장 재임 때 전경련이 건의해 이뤄진 것.
이 회장은 62년1월1일 회원들과 함께 현지답사를 마친 뒤 1월5일 『공장이 모여있어야 생산·운송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요지의 건의문을 정부에 냈고 이 건의는 즉각 받아들여져 2월3일 박정희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공식이 열렸던 것.
당시 전경련이 울산을 택했던 이유는 ▲육·해 교통의 요지인데다 ▲4계절의 기온 차가 가장 적은 점 등.
전경련 회장은 이 회장이 생애에 가졌던 유일한 대외 직함이었다. 정계·체육계 등에서 자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많았지만 『기업가는 사업으로 국가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업보국」론을 내세워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내부적으로도 전경련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써 ▲당시 기업차원에서는 전무했던 조사부를 전경련사무국내에 설립 직후 설치했고 ▲사무국직원의 공채제도를 도입, 회장이 바뀌더라도 전문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훗날에 대비했다.
이 회장에 이어 2, 3대회장을 지냈던 고 이정림 회장(1913∼1990)은 16세 때 개성 시내 상점의 점원으로 출발, 50∼60년대 국내 시멘트·석유화학공업의 선구자역할을 했던 입지부적 기업인이었다.
이 회장은 국내 첫 시멘트 공장건설·합성수지제조 등의 풍부한 아이디어를 전경련 운영에 반영, ▲울산공단에 이어 내륙공단으로는 처음인 한국수출산업공단(구로공단)설립을 발의했고 ▲부설기구로 수출촉진위원회를 설치, 다양한 수출 증대 방안을 정책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재임 기간 중 경제 재건 과정에서 소외돼 있던 비회원들이 별도의 단체구성 움직임을 보여 재계가 양분될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개성상인 특유의 포용력을 발휘, 이들을 모두 회원으로 끌어들여 전경련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만들기도 했다.

<10년 재임 최 장수>
4, 5대와 9∼12대 등 6대에 걸쳐 회장직을 역임했던 김용완 회장(1904∼)은 총10년이란 역대회장 중 최 장수기록을 남겼다.
이같이 회장직을 오래 맡았던 것은 김 회장이 원해서라기보다는 회장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립초기여서 회원간의 의견수렴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정부로부터 각종 주문이 쏟아지고 일부에서는 「특혜단체」라는 비난도 있어 아무도 「총대」를 메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4대 회장취임 때는 회원들이 투표로 회장을 뽑는 첫 기록을 남겼다.
김용완씨가 회장직을 맡지 않으려 하자 회원들이 형식적인 투표방식까지 동원, 강제로 떠맡기다시피 했던 것.
5대에도 적임자가 나오지 않자 한달만 더 맡기로 했다가 계엄령이 터져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김 회장이 자연스럽게(?) 1년 임기를 더 맡게됐고 69년 9대에는 『회장을 자주 뽑는 것이 어렵다』는 회원들의 요구에 따라 회장임기가 1년에서 2년으로 늘어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10년을 채운 뒤에야 물러날 수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내기보다는 여론을 모아 합의를 이끌어내는 스타일로 재계와 정부간의 중개자 역할로 최적임자였다는 평이 남아있다.
김 회장은 자신의 회사(경방)는 원칙을 끝까지 지켜가며 보수적으로 운영, 결국 타 기업처럼 뻗어나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있지만 전경련이 오늘날의 체계를 갖추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8·3조치로 불리는 72년의 사채 동결 조치는 『고리대금업으로 기업이 멍들고 있다』는 회원들의 중지를 모아 박 대통령과 독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취해진 것이었다.
당시 사회구조는 실물경제가 앞서나가고 정치·사회부문 등이 이를 뒤따라가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 같은 격차를 메울 보조 기구들이 필요했다. 김 회장은 수많은 기구들을 스스로 만들거나 설립을 정부에 건의했다.
6∼8대 회장을 역임한 고 홍재선 회장(1906∼1980)은 일제시대에 금융조합 이사를 지내는 등 금융계출신으로 실물경제와 금융부문을 접목시키는데 큰 업적을 쌓았다.
기업별로 진행되던 당시의 외자도입 관례를 뛰어넘어 공동도입 후 나눠 쓸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 67년 4월에는 첫 민간국제금융기구인(주)한국개발금융(장기신용은행 전신)을 전경련과 세계은행(IBRD)합작으로 발족시켰다.
13∼17대에 걸쳐 김 회장과 거의 비슷한 10년 동안 장기 재임했던 정주영 회장(1915∼)은 기업경영에서 보여주고 있는 추진력을 전경련 운영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동남아·유럽지역 등과의 각종 경제협력위원회를 잇따라 구성, 전경련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70년대 후반 각 기업의 중동진출 과정에서는 전경련 회장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자율성 크게 높여>
소신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어서 『너무 독주한다』는 일부의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뚝심 있는 처신으로 전경련의 자율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12·12직후 신군부가 사임 압력을 넣었을 때 『나는 회원이 뽑아준 회장』이라며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 없다』고 버티었던 것은 사무국 직원들 사이에 긍지로 남아있다.
18대인 구자경 회장(1925∼)은 사실은 17대 때 정 회장이 사임의사를 강력히 표명함에 따라 적임자로 물망에 올랐었으나 지방출장을 이유로 회장을 뽑는 자리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넘겼다가 결국 18대 때에는 원로들의 강권을 피하지 못하고 말았다.
구 회장은 그러나 일단 회장을 맡은 뒤에는 전경련 집무실에 나와 있는 시간이 자신의 그룹 회장실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구 회장의 재임기간은 6·29를 전후한 사회적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연히 전경련에 쏟아지는 비판도 많았고 사무국에서는 『역대 회장 가운데 가장 고생을 많이 했던 회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본인 스스로 『의사 표현이 솔직한 것이 단점』이라고 밝혔던 것처럼 정치자금과 관련해 『자유 경제 수호 원칙에 어긋나는 정당에는 돈을 못 준다』고 발언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88년 홍보부를 경제사회개발원으로 확대 개편, 산업시찰·산업영상전등 각종 사업을 통해 기업의 이미지 쇄신에 주력했었다.

<체질개선작업 시급>
개인기업을 갖지 않은 비오너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회장에 호른 유창순 현 회장은 올 들어 부동산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회원들로부터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는 회장 개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전환기적 시대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유 회장은 재계의 이익과 국민 경제적 차원의 조화를 동시에 추구하려했으며 자유경제주의를 창달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
오히려 현시점에서 전경련의 가장 큰 문제는 전체적인 무기력 등에서 찾아질 수 있다.
과거와 같은 회원간의 결속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비전도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차기 회장에 누가 되느냐』는 문제 못지 않게 전경련의 전반적인 체질 개선 작업이 과제로 남아있다.
즉 진정한 민간경제 시대를 이끌 주역으로 조직의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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