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지식인의「사회참여」 모델 정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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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올해 학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활동의 주역은 지난 6월 서울대 교수 86명이 모여 만든 「서울대 사회정의연구실천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국내외로 격동의 연속이었던 올 한해 동안 새로운, 보다 합리적인 「지식인의 사회 참여」 모델을 정립하고자 노력해왔다.
모임을 제안, 준비하고 창립이후 일상 업무를 도맡고 있는 총무 한상진 교수(사회학)는 『급속한 변동의 전환기에 사회 발전을 위한 지식인의 현실참여는 불가피하다. 학자로서 학문적 연구활동을 통해 현실문제를 언급하고 나아가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 개혁을 촉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모임이 필요했다』고 모임의 결성취지를 밝혔다.
이 같은 생각은 모임의 발기단계에서 서울대교수 86명의 공감으로 확산돼 「발기선언문」으로 나타난다.
『세기적 대변화가 전개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깊이 고뇌하고 반성하면서 지식인 본연의 자세로 서로 협력하여 이 시대의 혼돈과 방황을 극복해 갈 새로운 이념과 질서를 모색하고 사회정의의 신장과 개혁의 촉진을 위해 모임을 결성, 학제간 연구와 토론에 박차를 가하고자 한다.』
한 교수와 회장인 권태준 교수(환경대학원)등 몇 사람의 공감에서 싹튼 모임은 5월12일 86명의 발기인 선언으로 이어졌으며, 6월22일의 정식창립에는 1백21명이 회원으로 참가했다. 현재는 1백32명으로 늘었다.
모임이 보여온 새로운 사회 참여 모델은 두 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첫째는 전공 분야간의 벽을 허문 공동 연구의 활성화다.
『학문이 민족적·사회적 관심에 충실히·접목되는 참된 학문 공동체 추진』이라는 취지에 따라 모임은 현실참여에 있어서 「학문적 자세」를 강조했다.
모임은 「과학기술 발달과 복지」 「교육과 사회발전」등 주요 사회문제별 4개 분과를 만들어 매주 화요일마다 집담회(콜로키움)를 열어왔으며, 학기말에는 그 결과를 총괄하는 공개세미나 「우루과이라운드-개방과 종속」「정치개혁·사회복지·통일전망」을 개최했다. 이밖에 특별분과로 「정치개혁분과위」를 지난 7월 구성, 월2∼3회씩 토론회를 개최해 왔다.
특별분과는 내년부터 이어질 각종 선거를 앞두고 선거제도 개혁방안을 연구중이다.
둘째는 연구를 강조하는 모임이 흔히 소홀히 하기 쉬운 「대 사회적 발언」에도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지난 10월6일「인권억압관련기구개혁과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 발표. 모임은 당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이사회 문제화되던 시접에 맞춰 『정보 및 수사기구의 인권경시 및 억압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체계적 개혁』을 요구하고, 대통령에게 『불법적 사찰의 중단을 국민에게 선언하라』고 촉구했다. 이 성명은 기본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교수들의 신랄한 현실비판으로 많은 일반인이 공감,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을 뒷바라지해온 한 교수는 올해의 활동을 『출범원년의 정지작업』이라고 성격 지웠다.
한 교수는 『반년에 걸친 활동결과 회원 서로간에 최소한의·공감대는 확실히 만들어진 것 같다. 특히 그간 단절됐던 인문·사회과학분야와 자연과학분야간의 활발한 대화와 공동연구의 계기가 된 것은 뜻깊은 성과』라고 밝혔다.
한 교수는 『내년에는 보다 왕성한 활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모임은 우선 겨울방학동안준비를 계속해 내년 봄 학기초 「과학기술과 환경문제」「사회주의 이념문제」등 공개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 보다 구체적인 현실개혁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세입·세출구조, 국방비 문제 등 「재정정책합리화」를 연구중이며, 교육의 근본적 구조개혁을 위해 「사교육비의 공 교육비로의 전환방안」등도 연구중이다.
「사회정의 연구실천 모임 」이 학계의 이데올로기적 중간지대로 크게 부상한 한편 진보·보수의 양진영도 격변하는 국내외정세에 따라 많은 활동을 보여준 한해였다.
진보적 학계는 지난해 말부터 계속된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연초에는 페레스트로이카의 해석을 둘러싸고 ▲진정한 인간적 사회주의의 회복 ▲정통사회주의로부터의 이탈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 등 논쟁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논쟁은 급속한 변화양상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 필요한 현장 검증과 자료 입수가 어려운 현실적 제약으로 점차 추상적인 수준에서 맴도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 결과 『보다 실증적인 연구 수준을 높이자』 『변화가 일단락 될 때까지 지켜보자』는 등의 신중론이 대두해 후반기에는 크게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반면 보수학계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를 「명백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일관된 주장을 펼치며 진보적 학계의 정치정제학적 접근방법을 비판했다.
보수학계는 또 진보학계의 해방전후사 연구에 대한 비판과 88년 이후 국내에 급속히 보급돼온 북한의 역사해석에 대한 비판도 병행했다.
한국도덕 정치 연구소(소장 한승조)가 지난 11월 펴낸「해방전후사의 쟁점과 평가」는 80년대를 풍미해온 진보학계의 현대사연구를 광범하게 비판한 책으로 주목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정신문화연구원 등이 주최한 북한의 한국학·역사비판도 오랫동안 침묵했던 보수학계의 포괄적·반론으로 성격 지워질 수 있다.
후반기의 주요 이슈는 「통일」문제로 이어졌다. 독일통일에 자극 받아 한반도 통일의 현실적 대안, 통일된 미래상에 대한 검토 등이 있었다.
이밖에 지난 8월에는 오사카학술회의에서 남북학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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