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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공포로부터의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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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당시 S씨는 몇 달 동안 인기차트 1위를 달리던 톱가수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그는 출소 후 가까운 사람들에게 대마초에 손을 대게 된 경위를 이렇게 말했다.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졌어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시선을 참기도 힘들었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으로 불면의 날이 계속됐죠. 그럴수록 이런 세상에서 자꾸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지더라고요."

인기 스타였던 여가수 A씨가 갈등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살을 기도한 일도 있다. A씨는 자살 기도 전 지인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고 나서 희망을 잃었다.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대중으로부터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다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심리적 방황과 공황을 겪는 이 같은 사례를 방송가에선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비단 가수뿐 아니다. 영화배우나 탤런트, 스포츠 스타들도 인기가 떨어지거나 기록이 부진할 때 크든 작든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겪게 된다. 정상의 자리에 있을수록, 대중이 열광하는 강도가 강렬할수록 그 '달콤한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인간 심리의 속성 때문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산다는 면에서 보면 정치인도 스타와 다를 바 없다.

정치인의 지위를 지탱하는 것도 바로 대중의 지지다. 정치인들이 가장 참지 못하는 것은 '욕먹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는 것'이다.

한때 '여의도 마당발'로 불리며 정치권을 풍미했던 원로 정치인 김상현 전 의원은 스스럼없이 "신문에 본인의 부고 기사 아니면 뭐든지 나는 게 좋다"는 우스개로 폭소를 자아내곤 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일수록, 정상에 있던 사람일수록 추락할 때 겪는 상처의 골은 더욱 깊게 마련이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역시 예외가 아니다. 최고 권좌에 있었기에 추락할 때 겪는 정신적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는 게 대통령을 보좌했던 참모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6공 때 청와대 수석을 지낸 한 정치인은 "대통령은 취임 3년차를 넘어서면서부터 다음 정권을 의식하게 된다. 자신의 재임 중 이뤄졌던 정책이나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다음 정권에서 들춰지지 않을까 초조해진다"고 말한다.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의 공포다.

역대 대통령은 레임덕을 막는 데 골몰했다. 대대적 사정(司正)으로 공무원들의 충성을 강요하는가 하면 자신이 다음 정권을 만들어내겠다며 '킹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임기를 다 마치지 않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식 생존 전략으로 읽힌다. "그만두라"고 하기 전에 먼저 "그만둘 수도 있다"고 배수진을 침으로써 상대의 공격을 무르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치판을 혼돈으로 몰아넣어 탈출구를 모색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셈법은 틀렸다. 왜냐하면 집권 초 75%의 높은 지지가 9.9%로 추락케 한 책임은 바로 노 대통령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소수자로 규정하고 세상을 소수자와 기득권과의 싸움으로 규정한 노무현식 리더십에 국민이 등 돌린 결과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방식을 과감히 내던져야 한다. 그래야 레임덕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1년3개월이나 남아 있다.

이정민 정치부문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