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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칭더 “천안문 사태는 애국운동” 중국 “트러블메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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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 라이칭더 후보가 12일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라이 당선인의 앞길은 입법원(국회) 선거 결과 여소야대라는 점에서 험로가 예상된다. 왼쪽은 부인인 우메이루 여사. [EPA=연합뉴스]

지난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 라이칭더 후보가 12일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라이 당선인의 앞길은 입법원(국회) 선거 결과 여소야대라는 점에서 험로가 예상된다. 왼쪽은 부인인 우메이루 여사. [EPA=연합뉴스]

대만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 당선인은 1959년 타이베이현(현 신베이시)의 시골 해안마을 완리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95일 만에 아버지가 광산 사고로 숨졌다. 어려운 형편에도 수재 소리를 들으며 국립 대만대 물리치료학과를 졸업했고 대만 성공대 의대, 하버드대 공공보건학과(석사) 등에서 공부했다.

타이난시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던 그가 정치와 인연을 맺은 건 1994년. 민진당 소속으로 대만성 성장 선거에 출마한 천딩난 전 법무부장(장관)을 도우면서다. 라이칭더는 타이난시를 지역구로 1998년 입법위원(국회의원 격)에 당선된 뒤 내리 4선을 했다. 2010년 타이난 시장 선거에서 당선됐고, 연임에 성공해 2017년까지 시장을 지냈다.

중앙 정치무대에 데뷔한 건 2017년이었다. 당시 경제지표 부진과 정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린취안의 뒤를 이어 행정원장(국무총리 격)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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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권주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총통 선거를 한 해 앞두고 라이칭더는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에게 반기를 들고 당내 경선을 제안했다. 대만 역사상 처음이었다. “나라면 대만의 독립을 일궈내는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다. 경선에서 차이 총통에게 석패했지만, 차기 대권주자 이미지 구축에 성공했다. 이후 차이 총통이 라이칭더를 러닝메이트로 지목해 부총통이 됐고, 지난해 당 주석 자리에까지 오르며 대선후보 입지를 굳혔다. 라이칭더는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 중 중국이 가장 불편하게 생각한 인물이다. 지난해 라이칭더가 총통 선거 후보로 확정되자 중국 당국은 그를 ‘배신자’ ‘트러블 메이커’로 부르며 노골적으로 비난해 왔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계기가 된 건 2014년이다. 타이난 시장이던 라이칭더는 생애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상하이 푸단대학교를 찾은 그는 “대만 독립은 대만인의 자결권을 위한 것이며 대만 내에서 완벽한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1989년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 이후 일어난 학생운동은 애국운동”이라며 중국 당국이 금기시하는 1989년 6·4 천안문 사태도 언급했다.

실제 그는 대만 내에서 화독(華獨·중화민국 독립)파로 분류되는 차이 총통보다 대만 독립 성향이 더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진해 2011년 타이난 시장 시절 중국식 한어 병음 표기를 거부하고 대만식 통용 병음이나 웨이드-자일스식 표기법을 쓰도록 조례를 제정했다. 중화민국 국호도 대만공화국으로 바꿔야 한다는 대독(臺獨·대만 독립)파란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엔 “대만은 이미 주권국이기 때문에 총통에 당선되더라도 독립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중화민국이란 국호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라이칭더는 아내 우메이루(吳玫如)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우메이루는 조용한 내조자 역할을 맡아왔다. 대만전력공사에서 일했고 라이칭더가 정계에 본격 진출한 뒤엔 내조에 전념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주로 남편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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