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뒤덮은 ‘재개발 폭탄’] 서민들 보금자리만 허물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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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은평 뉴타운이 개발되면 통일로는 교통 지옥이 될 수 있다.

은평구는 길음, 왕십리와 함께 뉴타운 시범지구다. 2·3차 뉴타운 계획에 따라 사업 시행이 시작됐거나 앞으로 시행될 20여 곳의 역할 모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가면 나머지 지역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은평구 29곳에서 진행되는 재개발 사업 역시 뉴타운과 어떻게 연계될 수 있는가에 전문가들도 주목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에서 지정된 재개발 구역은 총 300곳이다.

은평 뉴타운은 현재 1지구가 25%, 2지구는 5%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3지구는 막바지 보상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올 10월 분양 예정이었지만 지난 9월 1500만원이 넘는 고분양가 논란으로 서울시가 ‘후분양제’ 카드를 내밀면서 내년 9~10월로 연기됐다. 재개발은 두 개 구역(불광 1구역, 응암 6구역)이 완료됐고 29곳이 지정됐다.

“뉴타운에 서민 없다” 비난

결론부터 말하면 은평 뉴타운과 재개발 사업은 ‘모범 답안이라기보다는 오답을 통해 정답을 찾게 해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고분양가 발표로 부동산 폭등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뉴타운에 서민은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 정책이다 보니 중앙 정부나 기초자치단체가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아 정책 혼선도 잦았다.

무엇보다 분양가 문제가 폭탄이었다. 서울시는 후분양제를 실시하고 용적률을 높여 분양가를 낮추겠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미 설계가 끝나 착공돼 변경이 어렵기 때문이다.

SH공사가 분양 때까지 금융권으로부터 건설 비용을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분양가가 더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여기에 정부가 “후분양제를 재검토하겠다”고 하고, 서울시가 “그대로 추진하겠다”며 반격해 정책 혼선까지 일으켰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SH공사는 억울할 수도 있다. 일부 은평 뉴타운 이주민은 “SH공사가 주민들 요구를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것도 이해하고, 한명 한명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은 개별적으로 도와주려고 한 것도 안다”고 말했다.

이득을 잔뜩 남기는 공기업이라는 비난에 공사 관계자는 “뉴타운 공사 시작할 때 보상비 대느라 은행 이자만 하루 1억원이 넘었다”며 “후분양이 될 경우 분양가도 못 받으니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하지만 뉴타운이 결국 살던 주민을 내모는 정책이 됐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서울시는 뉴타운 계획 초반부터 “뉴타운 사업은 기존 커뮤니티를 가능한 한 보존해 최대한 재정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길음 뉴타운의 경우 원주민 재정착률은 13%대다. 은평의 경우 일부 시민단체는 재정착률을 5%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평형 이하가 많았던 진관내·외동의 경우 보상비는 최대 평당 700만~800만원이었다. 20평형 주택 소유자에게 1억4000만~1억6000만원 정도의 보상비와 입주권이 지급됐다. 이 경우 뉴타운 분양시 입주를 하려면 높은 분양가 때문에 추가로 2억~3억원이 필요하다. 서민들로서는 도저히 재정착할 수 없는 구조다.

뉴타운이나 재개발은 낙후된 지역을 정비하고 충분한 주택을 공급하는 데 목적이 있다. 목적의 대상은 당연히 ‘서민’이다. 서울시가 그렇게 얘기해 왔다. 그런데 뉴타운 사업은 서민 주거지를 박탈하는 전형으로 변질되고 있다.

더욱이 국공유지·무허가 주택·영세 상인·세입자·그린벨트 지정 지역 주민에 대한 보상 체계 원칙이 흔들리면서 혼선을 빚었던 것도 다른 뉴타운 지역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교통 환경 평가가 미흡했다는 것도 계속 지적돼 왔지만 아직까지 대책은 없다. 은평 뉴타운은 왕복 6차로인 통일로를 통해 서울로 진입한다. 이곳은 상습 정체 구간이다. 여기에 뉴타운 바로 위로 삼송 지역이 개발된다. 교통지옥이 될 것이 뻔한데 아직까지 뾰족한 대책은 내놓지 못한 상태다.

지역 내 갈등만 부추긴 셈

재개발 추진 과정도 난맥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개발구역은 은평구 전체 면적의 5.2%지만 남진 서울시립대 교수는 “은평구의 도시공간 구조가 확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대로라면 난개발을 피하기 힘들다. 원주민 재정착률을 높이는 것도 요원하다.

은평구 재개발 지역이 안고 있는 난제 중 하나는 ‘지역 커뮤니티’의 붕괴다. 크게 두 가지다. 원주민이 떠나야 한다는 것과 미개발 지역과의 단절이다. 물론 은평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성호 열린우리당 의원에 따르면 재개발이 완료된 35개 구역에서 입주권을 가진 가옥주 중 59%는 입주를 포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관악구 봉천 4-2 지구는 입주율이 20%에 불과하다. 가옥주가 이 정도면 세입자나 소규모 지분 소유자는 재개발 후 추가부담금을 낼 수 없어 거의 이탈됐다고 보면 된다.

은평구는 더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은평구의 재정자립도는 서울시 25개구 중에서 23위다. 그만큼 저소득층이 많다. 여기에 29개 개발 구역 1만7900가구 중 1만여 가구가 세입자 가구다(은평구청 재개발 행정팀 관계자).

세입자에게 임대주택이 나오지만, 지금껏 재개발 지역에서 충분한 임대주택이 공급된 적은 없다. 임대주택이 나오더라도 낮은 전·월세를 살고, 소득이 높지 않은 세입자들은 보증금 2000만원 이하, 월 임대료 10만원인 임대아파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도시행정 전문가들은 “임대아파트는 철저하게 평형을 낮춰야 한다”고 말한다. 임대주택 거주자의 특성과 경제력을 잘 살펴 충분한 양을 공급해 주고, 금융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평구 재개발 구역 내 원주민은 개발 완료 후 얼마나 정착할 수 있을까?

김종선 구의원은 “90%는 이사해 새로운 동네가 형성될 것”이라며 “특히 세입자 구제 방침이 없다”고 말했다. 남진 교수는 “20%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동의도 날림으로 받았다”

구역별로 따로 시행되다 보니 미선정 지역과의 갈등이나 구역 간 사업 연계성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부동산 업자는 “현재 개발 지정구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간 땅값 차이가 평당 300만~500만원 정도고 갈수록 벌어지고 있어 갈등이 심하다”고 말했다.

또 29개 구역이 따로 계획이 수립되고 사업이 진행되다 보니 공공시설 확보나 도로 등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데 혼선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주민 의견 청취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은평구청 관계자는 “재개발은 주민의 동의를 받아 시행하는 것으로 의견이 충분히 수렴됐다”고 했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응암 9구역의 한 주민은 “재개발 구역지정부터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주택재개발 기본계획 수립(주민 50% 동의)부터 구역지정 신청(80% 동의) 단계를 거치지만 제대로 된 공지 없이 날림으로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재개발 지역에서 늘 불거져 나오는 얘기다.

이 주민은 시공사 선정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시공사는 조합 설립 후 주민총회를 거쳐 선정해야 하지만 계획 발표와 동시에 일부 세력과 건설사가 물밑작업을 하면서 비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이 역시 은평구가 재확인해 준 재개발 지역의 고질적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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