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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희망의 끈이 절실한 고립·은둔 청년 54만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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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성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

김성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

“가족과 친구와 세상이 나를 버렸어도 정부는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젠 희망의 끈도 없어서 의지할 데가 없다.” 한국의 20·30세대 청년 중 5% 이상, 약 54만명이 타인과의 교류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지 체계 없이 고립돼 있다. 2019년에 그 규모는 3%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타인과 사회를 잇는 끈을 약화시킨 여파는 한동안 이어질 것 같다.

정부에서 실시한 전국 단위의 첫 고립·은둔 청년 심층 조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조사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청년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폭력 경험의 아픔, 경쟁에서 비롯된 좌절감 등 사회에서 상처받은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만났다. 조사에 응한 고립·은둔 청년의 80% 이상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지 못했다.

고립·은둔 청년 지원책 발표 환영
지원 규모·인력 아직 충분치 않아
법적 근거 갖추고 체계적 지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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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은둔 청년을 이대로 방치하면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안으로 더 숨어 들어가는 것뿐이다. 일본에서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라 불리는 ‘은둔형 외톨이’의 규모가 줄어들지 않고 점차 나이 들어가는 현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정부가 나름의 대응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한국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고립된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한국사회가 부담할 비용으로 돌아온다. 줄어든 기회와 멀어진 대인관계 속에서 자책하며 방 안으로 숨어 들어간 청년들의 간절한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같은 날 발표된 범정부 지원 대책이 그래서 더없이 반갑다. 고립·은둔 청년의 어려움을 사회가 같이 해결할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가 나설 것을 공식화했다는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지가 약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데 왜 도와줘야 하느냐”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러한 오해는 고립·은둔 청년을 복지사업의 지원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도움을 받아 취약성을 극복하면 충분히 독립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주체다. 3~5년 동안 고립·은둔 생활을 하다가 민간 지원 기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사회로 나온 ‘은둔 고수’들도 있다. 이제 이들은 당당한 직장 동료이자,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실태조사 수행과 보건복지부의 시범사업 지원 프로그램 설계에도 많은 조언을 해줬다.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립·은둔 청년은 전국 곳곳에 있다. 정부는 내년에도 4개 지역을 중심으로 전담 지원 기관을 설치한다고 발표했는데, 지원 규모나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밖으로 나오라고 권하고, 몇 건 발굴했다며 성과를 자랑할 일은 아닐 것이다.

우선 2년간 시범사업을 통해 적절한 지원 규모 등을 검토한다고 하니 앞으로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17개 광역 지방자치단체와 226개 기초 지자체에 있는 고립·은둔 청년까지 두루 촘촘히 닿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시범사업에서 정부가 고립·은둔 경험이 있는 청년이 주체적으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자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준비되지 않은 당사자의 등을 떠밀기보다 실태조사에 응한 청년들의 바람처럼 당사자 본인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 맞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지원 사업 운영을 위한 제도화가 필요하다. 시범사업에 그친다면 정부에 기대를 갖고 회복과 사회 복귀를 시도할 이 청년들은 또다시 고립될 것이다. 법적 근거와 적절한 예산을 갖춘 지원 사업을 전국에서 안정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더구나 이들은 또 다른 실패 경험을 무척 두려워한다. 어서 밖으로 나오라고 채근하기보다는 차근차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가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고립과 은둔 경험을 가진 이들에 대한 선입견을 접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인식을 확산해야 한다. 이번 대책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수 없던 고립 청년들이 쥘 수 있는 탄탄한 희망의 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