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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평화롭다" 닷새 뒤 전쟁…"천재"라는 美외교 넘버2의 실수

중앙일보

입력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5일(현지시간) 브리핑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5일(현지시간) 브리핑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중동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평화롭다."
지난달 2일, 미국 외교의 '투 톱' 중 한 명이 쓴 글의 일부다. 글쓴이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핵심 브레인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함께 미국의 외교 정책을 총괄한다. 설리번이 쓴 글은 포린폴리시(FB)에 게재됐으며, 7000단어에 달하는 장문이다. 제목은 "미국의 힘의 원천"으로 달았다. 공교롭게도 이 글이 발행된 닷새 후, 중동은 화약고로 변했다. 가자 지구에서 무슬림 무장 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발발하면서다. 미국 외교 넘버2가 체면을 제대로 구긴 셈이 됐다.

설리번은 한국 외교가와 교류도 두텁다. 그와 수차례 회의를 했던 한 외교가 고위급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긴 회의 내용을 깔끔하게 핵심을 뽑아 정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면이 천재적이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해당 발언의 앞뒤 맥락을 살피면 이렇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그는 먼저 "중동은 영원히 지속될 도전 과제들을 여전히 안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선 과거 수십 년에 비하면 고요하다"고 적었다.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긴장과 이란의 위협 등 여러 미해결 과제는 남아있지만, 적어도 심각한 갈등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가자 지구의 위기를 완화해왔다"고 주장했다. 휴화산이던 가자 지구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황을 오판한 셈이다. 이 글의 해당 부분은 온라인 판엔 삭제된 상태다. 대신 기고문 제일 마지막에 원문의 PDF가 에디터의 정황 설명과 함께 붙어 있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조 바이든(맨 오른쪽) 대통령과 함께 회의 중인 제이크 설리번(가운데) 국가안보보좌관. 맨 왼쪽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다. 사진 미국 대통령 트위터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조 바이든(맨 오른쪽) 대통령과 함께 회의 중인 제이크 설리번(가운데) 국가안보보좌관. 맨 왼쪽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다. 사진 미국 대통령 트위터

이 글과 함께 설리번은 논쟁의 대상이 됐다. 외교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시니어 펠로우인 제러미 스턴이 지난달 말 "설리번은 끔찍한 실패 그 자체"라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게 대표적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외교 당국자로 일했던 브렛 브루언 역시 날 선 비판을 했다. NYT에 따르면 브루언은 "제이크는 뛰어난 인물이지만, 이런 분쟁 지역에서 실제로 지내본 경험이 전무하다"며 "몇몇 외교 사안에 있어선 단견(myopic)의 한계를 보인다"고 꼬집었다. 설리번과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브루언까지 비판에 가세한 것이다.

아군도 있다.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지난달 31일 "설리번을 옹호함"이라는 글을 냈다. 외교 및 안보 전문지인 이 매체는 "설리번은 지난 수년 간 백악관에서 실종됐던 중요한 자질을 보여주고 있다"며 "합리성과 현실주의에 입각한 국익 외교를 위한 리더십이 그 자질"이라고 주장했다.

설리번 보좌관 본인은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워싱턴DC를 방문한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과 만난 게 대표적이다. NYT는 그에게 기고문 관련 입장을 요청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설리번의 동료인 백악관 국가안보실 대변인 에이드리엔 왓슨은 NYT에 "(설리번 보좌관의 기고문을 둘러싼) 논란은 성의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왓슨은 NYT에 "설리번 보좌관은 외교 관련 이슈에 대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쏟아 고민을 해왔다"고 말했다. 직접 거주 또는 주재한 경험은 없어도 중동 문제에 있어서 적합한 전문가라는 반박이다.

지난 9월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질의응답 중인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EPA=연합뉴스

지난 9월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질의응답 중인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EPA=연합뉴스

설리번에게 '경험 부족'은 종종 발목을 잡는 문구다. 1976년생인 그는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적은 나이다. 커리어 외교관으로서의 현장 경험도 없다. 예일대에서 정치학으로 학사를 딴 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워낙 수재인 터라 장학금 및 월반 등을 수차례 했고, 세계토론대회에서 준우승도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변호사로 억대 연봉을 받거나, 정계로 진출하는 대신, 외교·안보 분야를 택했다. 이후 힐러리 클린턴이 오바마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하던 시절, 35세였던 설리번은 정책기획국장으로 발탁됐다. 힐러리가 다음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승리를 거뒀다면 국무장관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설리번 본인은 이번 기고문에 대해 직접 대응은 자제하고 있으나, NYT는 그가 쓴 기고문의 아래 내용에 주목했다. "미국은 그간 예상하지 못했던 국제사회 문제들을 직면해왔다"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이는 정부가 아무리 미래를 예상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분이다. 제아무리 설리번이라고 해도 이번 가자 지구 사태를 예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에둘러 옹호하는 뉘앙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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