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 품고 여성들 모여든 그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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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23면

호텔 바비즌

호텔 바비즌

호텔 바비즌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니케북스

‘광란의 20년대(the Roaring Twenties)’라고 불리던 시기인 1927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 ‘여성 전용’ 바비즌(Barbizon)호텔이 들어섰다. 센트럴파크 동쪽 렉싱턴애버뉴와 이스트63번가가 교차하는 곳에 건축된 이 독특한 호텔은 여성 전용이란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 23층 높이에 720개 객실로 설계된 이 호텔은 2007년 ‘바비즌/63콘도미니엄’이란 고급 주거시설로 재개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호텔 바비즌』은 이 유서 깊은 건물이 가진 미국의 현대사적, 여성사적, 건축사적, 사회변동사적 의미를 꼼꼼하게, 그리고 매우 재미있게 다큐멘터리 드라마처럼 펴낸 걸작이다. 뉴욕 배서칼리지 교수인 지은이 폴리나 브렌은 역사가이자 인터뷰어이자 인터넷 탐정이 되어 이 호텔과 관련된 스크랩북, 편지 묶음, 사진 등 각종 자료를 대량 발굴하고 감춰진 비사를 풀어냈다.

1920년대에 문을 연 바비즌은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은 여성들을 불러 모았다. [사진 니케북스]

1920년대에 문을 연 바비즌은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은 여성들을 불러 모았다. [사진 니케북스]

지금 시대엔 상상하기 어려운 여성 전용 호텔이 왜 100년 전 뉴욕에 들어서게 됐는지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상을 먼저 알아야 한다. 더는 딸, 아내, 어머니로만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른바 신여성은 19세기 말 등장했다. 이들은 가정 밖의 공간을 탐험하고 싶어 했고, 독립을 원했고, 발목을 붙잡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다.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가 통과되면서 미국 여성들은 참정권도 얻게 됐다. 이제 세상이 바뀔 때가 된 것이다.

바비즌에 앞서 뉴욕에는 역시 여성 전용으로 마사워싱턴호텔, 앨러튼호텔, 미국여성협회(AWA)호텔 등이 있었다. 주로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을 위한 앨러튼이나 AWA호텔과 달리 바비즌은 뉴욕에서 꿈을 실현해 보겠다고 결심한 미국 전역 젊은 여성들의 ‘신전’이 됐다.

바비즌호텔은 여성 고객들에게 보호와 안식을 약속했다. 엄격하게 여성 전용이었고 남자들은 로비까지밖에 들어올 수 없었다. 몇몇 남자들이 배관수리공이나 왕진 온 산부인과 의사로 가장하고 침투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고 전해져 온다.

1930년대에는 캐서린 깁스 비서학교 학생들이 3개 층을 기숙사로 사용했으며, 세계 최초의 모델 에이전시 파워스모델은 소속 모델들에게 바비즌 객실을 제공했다. 바비즌의 별명 ‘인형의 집’이 딱 들어맞는 모양새다. 인근 메디슨애버뉴의 유명 잡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들도 이 호텔에 묵었다.

바비즌에는 배우, 가수, 예술가, 작가 지망생들이 가득했다. 침몰한 타이태닉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가라앉지 않는’ 몰리 브라운은 최초의 바비즌 거주자 중 한 사람이었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 리타 헤이워스, 캔디스 버건, 재클린 스미스 등과 작가 실비아 플라스, 디자이너 뱃시 존슨도 주요 고객들이었다. 한때는 이들도 투숙객의 인성과 도덕성을 보증하는 추천서와 희망을 품고 바비즌에 갓 도착한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대공황과 2차 대전 등을 거치며 위기 속에도 바비즌은 주인을 바꿔가면서 꿋꿋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1980년대 경영난으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남성에게도 문호를 열게 됐다. 바비즌으로 상징되는 여성운동이 여성을 따로 격리해야 할 필요를 삭제시킨 결과이기도 했다. 장기 투숙 여성 고객, 이른바 ‘그 여자(the Women)’들은 남자 투숙객을 받으면 떠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은 남았다. ‘그 여자’들 일부는 지금도 바비즌/63콘도미니엄의 새로 단장한 4층 전용층에서 살고 있다.

바비즌은 20세기 대부분 동안 여성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자기 삶을 계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미국에서 2년 전 이 책이 나온 후 바비즌은 뉴욕의 새 명소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과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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