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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상현의 과학 산책

몰입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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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어떤 여름날이었다. 박사 과정 학생이던 나는 매일 같이 연구실에 나와 단 하나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텍사스 대학의 교수들이 수년 전 제시했던 문제인데, 육각형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고차원 공간에서 매끈한 곡면을 하나 찾아내라는 도전이었다.  그날도 진전은 없었다. 냉방 없는 석조 건물 안에서 나는 더위와 습기에 지쳐 갔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온 나는 낮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육각형과 곡면과 알파벳 변수들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대부분 의미 없는 그림이었다. 온종일 축구 게임을 하면 눈을 감아도 끊임없이 축구 장면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날 떠오른 그림 중 하나는 달랐다. 살짝 잠결인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돌려 보았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바로 일어나 노트에 적어 보았다. 맞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 틀린 점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잠이 들었고 한참 뒤 깨어나 맑은 정신으로 확인해 보았다. 오랫동안 내가 찾고자 하였던 바로 그 곡면이었다! 그 곡면은 나의 박사 논문이 되어 주었다.

과학 산책

과학 산책

돌이켜 보면, 꿈에서 문제와 씨름하는 시간은 거의 모든 연구마다 있었다. 쉬려 해도 강제 종료되지 않는 뇌의 상태. 새벽 3시 선잠 속의 아이디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트로 달려가는 경험. 이런 경험담은 다른 수학자에게도 흔하다. 영국의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도 『행복의 정복』에서 “어려운 주제를 맹렬하게 생각하고 나면, 몇 달이 지나도 무의식이 자신을 대신해 계속 일해주고 있다”고 썼다.

이런 꿈을 꾸려면 조건이 있다. 눈을 감고도, 잠을 자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사실과 수많은 사람의 실패에 통달하여야 하고, 지금 내가 넘어설 준비가 된 장애물 하나가 또렷이 보여야 한다. 이때, 꿈의 힘을 빌려 꿈꾸던 목표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몰입의 꿈이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