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김대중 “카터 당선되면 살고, 레이건 되면 죽는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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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12〉

1980년 9월 17일 1심인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장면. 앞줄 오른쪽부터 헌병을 제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0년 9월 17일 1심인 육군 계엄보통군법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장면. 앞줄 오른쪽부터 헌병을 제외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80년 5월 17일 밤 10시. 서울 동교동 집으로 무장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나, 김대중(DJ)의 가슴에 대검을 꽂은 소총을 겨누더니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체포했다.

“합수부(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왔습니다.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비슷한 시각,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서울 경복궁 안 중앙청(전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시위를 금하고, 대학을 휴교 조치했다.

나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사회 불안 조성·소요의 배후 조종, 부정 축재 등 혐의자로 몰려 그날 밤 어디론가 끌려갔다.

‘5·17 신군부 쿠데타’는 이렇게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79년 10·26 사태로 유신 체제가 붕괴한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던 ‘서울의 봄’은 거기서 멈췄다.

‘김대중의 내란 음모’라는 소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8월 27일 제4공화국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9월 1일 취임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1980년 8월 27일 제4공화국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9월 1일 취임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에서 취조당했다. ‘저들’은 내가 내란을 꾸미고,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며 실토하라고 몰아쳤다.

나의 과거 언행과 글을 샅샅이 뒤져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단서나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내란 음모는 터무니없다”는 항변은 소용없었다. 잠을 재우지 않은 채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또 물었다. 하루에 20~30번씩 심문했다. 잔인한 정신 고문이었다. 수사관이 불쑥 물었다.

(수사관) “광주에서 큰 사건 난 것을 아시오?”

(DJ) “(광주항쟁에 대해) 모릅니다.”

(수사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만난 적 있나요?”

(DJ) “전혀 모르는 사람이요, 만난 적도 없소.”

(수사관) “500만원을 주고 반정부 운동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자백하세요.”

(DJ) “그런 일 없소.”

나는 ‘정동년’이란 사람과 일면식도 없고, 이름도 듣지 못했으니 자백할 게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광주의 큰 사건’(광주항쟁) 발생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500만원’도 금시초문이었다.

신군부 합수부는 우리 집에서 방문자 기록을 뒤져 정동년이란 이름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정동년을 잡아와 혹독한 고문 끝에 나에게서 돈을 받았다는 거짓 자백을 만들었다.

훗날 정동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리 집을 방문했지만 내가 없어 그냥 돌아갔다고 설명했다.

“거짓 자백을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쓰고 남은 돈이 있으면 돌려 달라”는 나의 농담에, “500만원 안 주셨으니 지금이라도 받아야겠네요”라고 웃어넘기던 그의 얼굴이 기억난다.

‘빨갱이’ 색깔론 음해

광주항쟁 5일째 되던 5월 22일, 합수부는 ‘김대중 일당 내란 음모’라는 사건에 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0·26 사태 발생을 정권 획득의 호기로 인식한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 활동과 합법적인 계기를 통해서는 정권 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풍조를 심화시키고 국민 선동을 통해 변칙적인 혁명 사태를 일으켰다. 김대중은 대중 선동→민중 봉기→정부 전복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학원 사태를 배후 조종하였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짜놓은 각본이었다. 광주의 반정부 시위를 선동하고, 대학생들의 궐기를 부추겨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황당한 허구를 혐의라고 들이댔다. 나의 일생을 쫓아다닌 ‘빨갱이’ 낙인과 ‘색깔’ 음해도 이 시절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김대중은 8·15 해방 직후부터 좌익활동에 가담한 열성 공산주의자였다. 근래에 와서도 해외에서 북괴의 노선에 동조하는 반국가 단체를 만들고 불순분자와 접촉하는 등 극히 위험하고 음흉한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동을 자행했다.”

“협조하면 살고, 거부하는 죽는다”

체포된 지 50일쯤 지난 7월 10일이었다.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이학봉 보안사령부 처장(대령)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와서 나를 회유했다.

“협력하시죠. 우리와 함께 간다면 대통령직만 빼고 어떤 자리라도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거부하면 살려 둘 수 없습니다. 재판은 요식 행위에 불과합니다. 협조하면 살고, 거부하면 죽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학봉이 가고 난 뒤 수사관이 신문 한 뭉치를 갖다 줬다. ‘광주 폭동과 진압’ 사실이 담겼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협조하라는 뜻이었다. 광주항쟁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흘 뒤 이학봉이 다시 찾아왔다. 내 결심을 전했다.

“협력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죽인들 내가 어찌하겠소.”

사형 위해 ‘반국가단체 수괴’ 조작

회유를 거부한 뒤 경기도 성남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독방에 수감됐다. 신군부는 나를 5·18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엮어 형법상 ‘내란죄’로 처벌하려 했다.

하지만 정동년의 허위 진술 외에는 물증이 없었다. 워낙 근거가 빈약하자 ‘내란음모 선동죄’로 몰아갔다. 선동죄를 뒤집어씌워도 내란죄와 달리 사형시킬 수가 없었다. 선동죄의 최고 형량은 무기 징역이었다.

저들은 나의 사형을 위해 다른 죄를 창작했다. 국가보안법 1조 1항 ‘반국가단체 수괴죄’를 발굴했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내가 일본 한민통 의장에 취임했다고 조작했다.

“김대중은 반국가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하여 그 수뇌(의장)로 있으면서 북괴 노선을 지지·동조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했다.”

나는 한민통이 출범하기 전에 일본에서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했다. 더구나 의장을 맡을 의사도, 기회도 없었으니 내게 씌운 혐의는 소설에 불과했다.

입 모양이 옆으로 찢어졌다…사형

8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시작됐다.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결성하고 그 수괴가 되어 국가 안전을 위협했다”는 엉터리 혐의를 지어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최후 진술을 했다.

“나는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당하겠지만 이 기회를 빌려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머지않아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 보복이 이 땅에서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최후 진술이 끝나자 방청객들이 모두 일어섰다. 다 함께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우리 승리하리라’를 목청껏 불렀다.

9월 17일 1심 선고 공판이 다가오자 인간적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사형만은 면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재판장이 판결 이유를 읽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김대중 피고인이 반공이란 대한민국의 국시를 외면한 채 북괴의 주장과 노선에 동조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자행하고, 선량한 학생들을 선동·오도하여 개인의 정치적 욕망 달성의 도구로 이용하며 국가와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봤다. 입 모양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고, 입 모양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는다. 재판장의 입 모양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전두환은 레이건 당선 기대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 대통령(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TV토론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8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맞붙은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 대통령(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가 TV토론에서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선고 공판은 6분 만에 끝났다. 나는 죽을 목숨으로 추락했다. 사형 선고 소식에 지구촌 곳곳에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제 여론이 거세지면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11월 초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항소심(2심)에서 1심대로 사형을 받은 지 며칠 후였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는 강경 보수파로 기대를 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카터가 되면 살고, 레이건이 되면 죽는다.”

그해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 등 신군부도 미국 대선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카터보다는 레이건이 군사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에 유리하다고 봤다. 카터가 레이건에게 졌다. 슬퍼서 하염없이 울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이제는 죽었다.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다.”

81년 1월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나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사형수 김대중’,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조마조마했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거려 숨이 멈출 것 같았다.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1547)을 보실 수 있습니다.

13회 〈구사일생…2년 10개월 감옥살이〉가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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