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592개
-
“北, 연평해전 다음날 사과” DJ 밝힌 ‘월드컵 관람’ 비화 ㉕ 유료 전용
6월 15일 오전 우리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1차 연평해전은 대치 상황 끝에 교전이 이뤄졌으나 2차 연평해전은 북한 해군의 기습적 선제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된 점이 달랐다. ■ ☞월드컵 결승전 관람 논란 「 1차 연평해전과 달리 2차 연평해전 때 김대중(DJ) 대통령의 행보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
김일성 “김대중 지지하라”…DJ “그런 짓 말라” 북에 항의-김대중 육성 회고록〈19〉
1992년 12월 18일의 14대 대선은 민주당 김대중(DJ)과 민주자유당 김영삼(YS)이 각축을 벌이고, 통일국민당 정주영이 변수로 작용하는 구도였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진 95년 10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수행한 임채정 의원은 ‘20억원’이라고 했다) 동독인은 불행한 독일 통일의 교훈 심란한 기분을 전환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김일성 사망에 설익은 통일 낙관론 남북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영삼·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이 7월 25~27일로 정해졌다.
-
“평양은 기름덩이에 앉았다” 소떼와 방북한 정주영의 흥분 ㉔ 유료 전용
현대와 김 위원장은 금강산 개발 사업, 유전 공동 개발, 체육 교류, 경제 협력 사업 등에 합의했다. 나는 11월 2일 청와대에서 정 명예회장, 정몽헌 현대그룹 공동회장,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등 방북단 일행을 35분간 접견했다. (DJ) "어떤 사업에 합의했나요?" (정주영) "김정일은 ‘처음에는 금강산 개발을 않고 자연 그대로 두려고 생각했지만, 현대가 적극적으로 개발한다고 하니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
“정주영, 돌풍 일으켰지만 정치 지도자로서 적성은 없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8〉
민주정의당 총재를 맡고 있던 노 대통령 옆에는 통일민주당 김영삼(YS)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JP) 총재(이하 존칭 생략)가 섰다. 야권은 평민당과 3당 합당을 거부한 이기택·김광일·노무현 의원 등이 남은 ‘꼬마 민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YS는 특유의 돌파력으로 여당 대통령 후보까지 쟁취했고, 결과적으로 3당 합당의 덕으로 대권을 잡게 됐다.
-
“대북정책 운전대 잡아달라” 클린턴, DJ에 파격 제안했다 ㉓ 유료 전용
당초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40분간 나, 김대중(DJ)과 클린턴 대통령의 단독회담이 예정됐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으로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해 주기 바랍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햇볕정책이 원활히 추진되려면 미 의회를 설득하라고 조언했다.
-
“문익환·서경원 밀입북, 재야 영웅주의가 일을 악화시켰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7〉
‘김대중 바람’을 일으킨 덕분에 4·26 총선에서 70석을 확보함으로써 민주당(59석), 공화당(35석)을 따돌리고 제1 야당에 올라섰다. 노태우의 중간평가 족쇄 풀어줘 89년에 접어들자 노태우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DJ): "무슨 얘기인가?" (김원기): "우리 당 서경원 의원이 북한에 갔다 왔다고 그럽니다".
-
“김우중 몰락과 대우 해체, 내가 원치 않은 결말이었다” ㉒ 유료 전용
"길거리 거지도 정부가 하루아침에 부자를 만들 수 있다" "싼 이자로 은행 돈을 빌려 사채놀이만 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나는 "재벌을 개혁하고 한국 경제가 중산층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든 첫 대통령"을 다짐했다. (김우중) "재계가 구조조정을 확실하게 해야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
“87년 대선, 우리는 서로 싸우다 졌고 국민은 나를 원망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6〉
나, 김대중(DJ)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치고 대치했다.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언론 자유 보장, 양심수 석방과 사면·복권 등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전두환 정권이 선호하는 내각책임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불쑥 던졌다. 그런 식의 정치에 누가 승복하겠는가?" 단일화 협상 결렬, 독자 출마 대선 두 달쯤 앞두고 YS가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전당대회에서 경선할 것을 제의했다.
-
느닷없는 ‘1000억 비자금 의혹’…김태정 한 마디가 DJ 살렸다 ㉑ 유료 전용
이회창 후보의 신한국당(11월 21일 민주당과 합당 뒤 ‘한나라당’으로 개명)은 대선을 두 달 앞둔 10월 이른바 ‘김대중 비자금 의혹’이란 사건을 터뜨렸다. ■ ☞ 김태정의 수사 유보와 검찰 수사 결과 「 김태정 검찰총장은 10월 21일 DJ 비자금 의혹에 대해 수사 유보 결정을 내리면서 "청와대와 사전 의논이 없었다"고 단언했다. 결국 나는 선거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김태정 검찰총장으로 하여금 ‘비자금 의혹 고발 사건은 15대 대통령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공식 발표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
“대통령 직선제 되면 대선 불출마”…전두환에 던진 DJ 승부수-김대중 육성 회고록〈15〉
신민당은 군부 독재 비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당시로써는 금기시됐던 발언들을 쏟아냈다. 안보 위협을 부풀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무산시키려는 공안 정국을 돌파해야 했다.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선언한다".
-
“호남이 다 해 먹지 않겠나” 박태준, DJ 면전서 도발 질문 ⑳ 유료 전용
」 나는 97년 5월 정대철 후보를 누르고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도 6월 자민련 대통령 후보에 각각 선출됐다. 우리 당은 한광옥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야권 대통령 후보 단일화 추진위원회’를, 자민련은 김용환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을 위한 수권위원회’를 만들어 막후 협상에 착수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고, 집권 시 공동정부에 참여하는 각료는 양당이 동등하게 맡고, 실질적인 각료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을 갖는 실세 총리는 자민련 측에서 맡도록 한다".
-
“미국 가면 구속자 풀어주겠다” 안기부 회유…DJ 망명 결심-김대중 육성 회고록〈14〉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도록 하겠다’라고 합니다". 미국 정부와 정계·언론계·학계·종교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언론 자유 탄압과 인권 유린 등 한국의 어두운 실상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했다. ▶DJ="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한국의 독재 정권을 격려해주고, 인권 탄압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
DJ “92년 대선, 노태우 돈 받은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⑲ 유료 전용
1992년 12월 18일의 14대 대선은 민주당 김대중(DJ)과 민주자유당(민자당) 김영삼(YS)이 각축을 벌이고, 통일국민당(국민당) 정주영이 변수로 작용하는 구도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이 북한의 안전보장을 해주는 상호 간에 주고받기를 해야 한다. 나는 5월 12일 미국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북한 핵 야심 포기’와 ‘북한의 안보 보장’을 제기하며 미국과 북한의 양보를 촉구했다.
-
군부 “이제 김대중 죽여도 시비할 놈 없다”…미국, 구명 나섰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3〉
(※사형 집행은 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중단돼 현재에 이른다) DJ 감형-전두환 방미 놓고 거래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허씨로 불리는 영관급 장교가 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제 김대중을 죽여도 시비할 놈이 없다"며 기뻐했다. ‘면회실 마루 위에 세 자식이 큰절하며/ 새해와 생일 하례 보는 이 애끓는다/ 아내여 서러워 마라 이 자식들이 있잖소/(…)가족이 보고 싶다 벗들이 보고 싶다/ 강산도 보고 싶고 겨레도 보고 싶다/ 그렇다 종소리 퍼지는 날 얼싸안고 보리라’ "교도관님, 도와주세요" 아들의 호소 편지는 한 달에 한 번 가족에게 보낼 수 있었다.
-
“고생 그만하고 나와 갑시다” 노태우, DJ에 먼저 합당 제안 ⑱ 유료 전용
야권은 나, 김대중(DJ)의 평화민주당(평민당)과 3당 합당을 거부한 이기택·김광일·노무현 의원 등이 남은 ‘꼬마 민주당’으로 쪼그라들었다. 3당 합당을 통해 YS는 노태우의 후계를 바랐을 것이고, JP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바랐을 것이다.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이기택 총재의 ‘꼬마 민주당’은 여전히 활동 중인 상황이었다.
-
사형수 김대중 “카터 당선되면 살고, 레이건 되면 죽는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2〉
‘빨갱이’ 색깔론 음해 광주항쟁 5일째 되던 5월 22일, 합수부는 ‘김대중 일당 내란 음모’라는 사건에 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0·26 사태 발생을 정권 획득의 호기로 인식한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 활동과 합법적인 계기를 통해서는 정권 획득이 여의치 못할 것으로 판단,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 풍조를 심화시키고 국민 선동을 통해 변칙적인 혁명 사태를 일으켰다. 입 모양이 옆으로 찢어졌다…사형 8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시작됐다.
-
“내가 노태우 안 도왔다면, 대통령 쫓겨났을지 모른다” ⑰ 유료 전용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 김대중)과 통일민주당(민주당, 총재 김영삼)·재야의 3자 대통합이 이뤄지면 나는 2선으로 물러나 통합된 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다". 검찰과 안기부는 서 의원이 나에게 보고한 뒤 북한에 다녀왔고, 북한에서 받은 돈 중 1만 달러를 나에게 줬다는 허위 사실을 날조했다. 문 목사, 서 의원 사건에 이어 한국외대 임수경 학생의 방북 사건까지 겹쳐 89년은 온 나라가 수배와 검거로 점철된 공안 정국에 휩싸였다.
-
“80년 서울의 봄, 재야는 나를 대통령 만들려고 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1〉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재규의 10·26 사건은 박정희의 서거와 함께 유신 시대에 종말을 고했으니 들뜬 만도 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정부, 계엄사령관 정승화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축이 된 군부, 집권당 민주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정치권이 제각기 암중모색하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12·12는 전두환의 신(新)군부가 정승화의 구(舊)군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
“대통령 후보-당수 나눠 맡자”…DJ와 YS, 선택은 달랐다 ⑯ 유료 전용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언론 자유 보장, 양심수 석방과 사면·복권 등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전두환 정권이 선호하는 내각책임제 개헌도 수용할 수 있다고 불쑥 던졌다. 개인적으로 이미 나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이런 분노의 민심에 직면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는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며 언론 자유와 정당 활동 보장, 김대중 사면·복권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약속했다.
-
“유신의 심장 멈췄다는 김재규는 영웅도 의인도 아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0〉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유신에 반대하는 소리를 입이라도 뻥긋하면 잡아갔다. 신문 백지 광고 탄압 그해 가을 동아일보가 서울대 농대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를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편집국장 등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앙일보 등 전국 31개 신문·방송 기자들이 지지 선언문을 채택하고, 유신 반대 성명·집회·시위를 보도하며 유신 정치의 문제를 제기했다.
-
“아키노처럼 암살될 수 있다” 총선 4일 전, 목숨 건 귀국 ⑮ 유료 전용
가택 연금 중이던 김영삼(YS) 전 신민당 총재가 83년 5·18 3주기를 맞아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졌다. NYT 83년 6월 9일자에 ‘Kim’s Hunger Strike for Democracy in South Korea by Kim Dae Jung’ 제목으로 실린 글에서 "김영삼 총재는 양심수 석방, 시민권 부활, 표현의 자유을 요구하는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전하고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 부활을 지원해야 한다"고 썼다. "체류 목적이었던 신병 치료도 끝났고,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 고생한 인사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을 느꼈으며,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심각하고, 전두환 정권과 직접 대화를 하기 위해 돌아가겠다".
-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처복…두 여인이 김대중을 만들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9〉
세 번 낙선에 집안 ‘거덜’ 앞서 얘기했듯이(육성 회고록 4회),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위해 발췌(拔萃) 개헌안을 강행한 ‘부산 정치 파동’(52년)을 목도한 뒤 정치 투신을 결심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에 찌들던 59년 8월의 어느 날,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차용애와 이희호, 두 여인은 불굴의 정치인 김대중을 만들었다.
-
미국 망명 DJ, 카터 만나 “난 이제 죽었다 통곡했소” ⑭ 유료 전용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억울한 구속자들의 석방을 출국 조건으로 제시했다. 미국 의회에서 한국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스티븐 솔라즈 하원의원은 "한국에서 진정한 자유화를 위한 결정적 움직임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했다. 미국 정계·정부·언론계·학계·종교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언론 자유 탄압과 인권 유린 등 한국의 어두운 실상을 알리고 민주화를 위한 지원을 호소했다.
-
DJ, 납치 주도한 이후락에게 “해외 도피 안 하셔도 된다”-김대중 육성 회고록〈8〉
긴장감이 고조되던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그제야 나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박 대통령이 지시했거나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고 안도했다". ‘박정희 개입설’을 줄곧 부인하던 이후락은 박정희가 서거한 10·26 사태 이후인 80년 3월 ‘서울의 봄’이 오자 고향 친구인 최영근(국회의원 역임)에게 ‘박정희 지시설’을 털어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