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호신용품과 생존가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심새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심새롬 중앙홀딩스 커뮤니케이션팀 기자

사람들이 또 호신용품을 찾고 있다. 강력범죄 사건 직후마다 되풀이되는 현상이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21일부터 일주일간 호신용품이 네이버 쇼핑 트렌드(관심도) 전체 1위고 호신용 스프레이, 전기충격기, 삼단봉 등이 뒤를 이었다. 대낮 신림동 길거리에서 건장한 20~30대 남성이 무차별 희생당한 이후 남성들의 관심이 특히 급증했다고 한다. 운만 나쁘면 나도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호신용품 붐의 실체다.

전문가들은 위급 상황이 오면 반드시 ‘제압할 생각 말고 최대한 빨리 도망가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상대적으로 활용하기 어려운 삼단봉이나 전기충격기보다 2만~5만원대에 팔리는 호신용 스프레이가 좀 더 인기인 이유다. 캡사이신·고추냉이 등을 담은 최루액을 상대의 얼굴에 분사하면 순간적으로 시야를 마비시켜 시간을 벌 수 있다. 다만 평소 분사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이 필수다. 경찰기자였던 2011년 6월 서울 광진구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취재를 계기로 가방에 호신용 스프레이를 넣고 다닌 적이 있는데 한참 뒤 꺼내보니 입구가 굳어 있었다.

불의의 비극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구책이 퍼진 일은 그전에도 있었다. 5월 31일 북한 도발에 따른 서울시 경보 오발령 뒤, 온라인 쇼핑몰을 중심으로 한때 ‘생존가방’ 품귀 사태가 빚어졌다. 전쟁 등 대규모 재앙에 대비해 생존에 꼭 필요한 비상대피용품을 미리 꾸려두는 게 생존가방이다. 영어로는 ‘벅아웃백(Bug-out-bag)’이나 ‘고우 백(Go bag)’, 국내에선 ‘72시간 가방’ ‘생존배낭’ 등으로 부르는데 식수와 비상식량을 비롯해 담요·의약품·안전장비·플래시 등이 담겨 있다. 당시 맘카페 등에 “조난용 담요 재고가 없다” “북한이 언제 또 발사할지 모르는데 생존가방 물품 리스트 좀 봐 달라”는 글이 쇄도했다.

범죄와 전쟁에 대비하는 시민의식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생존가방에 이어 호신용품까지 유행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절대 오지 말아야 할, 최악의 상황을 연달아 대비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자꾸 씁쓸하게 느껴진다. 호신과 생존 우려에서 좀 더 자유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건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