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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보유 자부심' 곳곳에 구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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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핵실험 성공을 환영하는 대형 간판이 평양시 중구역에 내걸려 있다. ‘핵 보유국의 자랑을 안고 선군혁명 총 진군에 새로운 박차를 가하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평양=연합뉴스]

북한 핵실험 이후 11월의 평양은 '고난의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24일 오후 대북 지원 민간 단체인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가 후원한 평양시 강남구 장교리의 인민병원 준공식.

산모와 어린이를 위해 한국 측에서 X선 촬영기 등 각종 기자재가 올라갔지만 정작 시험 가동을 하지 못했다.

전력 공급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평양 시내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중심가의 밤 풍경은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외곽 지역엔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외국인이 많이 머무는 양각도 호텔조차 전등이 꺼진 층이 많았다.

한국 측의 한 인사는 "병원 기자재는 전압 변화에 민감한 반도체 등이 많아 고가의 변압기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갑자기 전압이 떨어져 기자재가 고장 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국 측의 지원을 받아 건설된 인민병원은 국제사회가 북한에 가하는 압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북한, 전략물자 반입 못 해=이 병원의 컴퓨터 기종은 386이다. 한국 측 관계자는 "전략물자 분류에서 제외된 386은 이미 단종돼 158만원이나 주고 어렵게 구입했다"고 말했다. 전략물자를 북한에 반입하지 못하게 한 정부 규제 조치 때문이다.

어린이와 산모의 결핵.황달.간염 판정을 위한 기자재도 북한에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혈액을 고속 회전시켜 각종 검사에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는 장비인데 우라늄 농축에 이용되는 '원심 분리기'로 오인돼 대북 반출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양 시내에서 장교리로 가는 울퉁불퉁한 길은 북한 주민들의 '고난의 흔적'처럼 보였다. 흙먼지를 내는 비포장길은 20여 분 전 달렸던 평양 중심가의 아스팔트 도로와는 전혀 달랐다. 북한 당국이 아스팔트를 깔 때 들어가는 피치를 수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북한은 지난해 백두산 삼지연 비행장 건설 공사 도중 우리 정부에 피치 추가 제공을 요구하며 승강이를 벌였다.

식량 문제는 내년 봄 춘궁기까지 북한 주민들에게 닥칠 최대 난제 중 하나다.

북측 인사들은 애써 말을 아꼈지만 올 여름 북한을 동서로 연결하는 철도(평라선.청년이천선)가 끊길 만큼 홍수 피해가 컸다고 한다.

?"핵 보유국 자부심 갖자"=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북한의 식량난을 경고하며 대북 지원을 호소했다. 방북 기간 중 묘향산에서 마주친 WFP 북한지부의 한 실무진은 남측 인사들에게 "모두 38명이 북한에 체류하는데 우리 역시 자유롭게 북한을 다니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도 북한 주민의 정확한 생활 실태를 모른다는 얘기였다.

북한 당국은 곧 닥칠 '고통의 겨울'을 앞두고서도 체제 결속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평양 시내 곳곳에는 '핵 보유국의 당당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제국주의자들의 온갖 도전을 단호히 짓부시자' '핵보유국의 자랑을 안고 선군혁명 총진군에 새로운 박차를 가하자' 등의 구호가 나부꼈다.

김일성 주석의 대형 석상이 있는 만수대에서 만난 한 꼬마 여학생도 남측 방문단에게 '체제 결속력'을 과시했다. 차가운 밤바람 속에 무릎에 오는 치마와 검은 스타킹 차림의 이 여학생은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나와서 청소를 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에서 일하는 고위 당국자는 북측의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핵실험 후 북측은 남측의 반응을 어떻게 보느냐.

"핵에 대해 (남측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미국이 칼을 휘두르는데 우리도 칼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측이 유엔의 대북 인권결의안에 찬성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는 인간 존엄에 관한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남측을 이해할 수 없다. 전에는 기권했는데 이번에도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문제처럼 판단하면 되는 것이었다. 향후 남북대화는 남측의 태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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