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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멈춰 세운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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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부산을 찾은 또 다른 이유는 비엔날레 미술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에서 나를 멈춰 세우는 작품들이 있다. 부산 비엔날레에서는 두 작품이 그랬다. 하나는 롤랑 보덴이라는 작가의 '잠자는 이의 꿈'이란 애니메이션이다. 대도시의 밤, 방과 편의점.도로.주차장.엘리베이터. 불은 켜져 있지만 어디에도 인간의 모습은 없다. 모두 어디에 간 것일까. 암울하고 불길한 현대인의 악몽을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가는 1962년 옛 동독 출신이다.

또 하나는 중국 광둥(廣東)성 오스람 전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터뷰와 퍼포먼스로 이뤄진 비디오 영상과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78년생인 차오페이(曹斐)라는 젊은 여성이다. 거대한 기계에서 차례차례 나오는 전구, 끝없이 흘러가는 컨베이어 벨트, 아무 말 없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여성 근로자들. 그들의 생활공간은 좁고,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온통 푸른빛이 감도는 잿빛이다.

너무나 비인간적인 근무조건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순진하고 아름답다. 시골에서 도시로 탈출하고, 가난함을 버리고 풍요한 삶을 갈구한다.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과연 그 꿈은 이뤄질까. 작품은 분명한 해답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시종 비통한 예감이 감돌고 있다. 작품 제목은 '누구의 유토피아인가'라고 한다. 보덴은 유럽의, 차오는 중국의 현재라는 순간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그야말로 동시대 예술의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부산에서 나를 멈춰 세운 또 다른 작품이 하나 있다. 나는 수녀원에 묵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조 에노스 수녀와 미술, 음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했다. 한참 에노스 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응접실에 걸려 있던 한 장의 커다란 그림에 눈이 머물렀다. 동양화였는데, 서양화처럼 다이내믹한 작품이었다. 뛰어난 구도에, 움직임이 살아 있었다.

에노스 수녀에게 그림에 대해 물어보자 이 그림을 그린 김 라파엘라 수녀를 불러줬다. 라파엘라 수녀는 간도 룽징(龍井) 출신으로, 일제시대부터 집안이 가톨릭이었다. 해방 직후 월남해 59년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비싼 물감 비용을 대지 못해 동양화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 시절 국선 입상 경력도 있다. 화가의 꿈을 접고 수녀원에 들어간 이후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았으나 수년 전 은퇴한 뒤 소품들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응접실 그림의 제목은 "'빛을 향해서'였는지, '새벽길'이었는지 학창시절 그림이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림 속에는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다섯 명의 여성이 걷고 있다. 모두 뒷모습이다. 그들의 얼굴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지만 비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 눈에는 난민 행렬로 보인다. 흰 가운은 팔레스타인이나 이라크 여성의 옷처럼 보인다. 난민 행렬이 한반도에서 멀리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약 40년 전에 그려진, 사람들에게 잊힌 한 장의 그림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나를 불러세웠다. 이는 난민의 슬픔이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또한 동시대 예술이다.

[원문 일본어]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현대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