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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프리즘] 전세사기의 주범은 금융시스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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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3호 30면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

전세사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전세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주택임대차 방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문제는 왜 애초 우리나라에만 전세라는 주택임대차 방식이 존재하는 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 국가에는 어째서 전세가 없을까. 그 이유는 이들 국가의 경쟁적인 은행산업을 생각하면 너무도 단순하다. 미국이나 유럽의 은행산업은 자율적인 은행 설립을 기초로 그 수가 현재 각각 7000~8000개에 달할 만큼 경쟁적이다.

미국·유럽과 달리 담보대출 제한적
주거 안정 위해 전세 찾을 수밖에

이렇게 많은 은행이 최소한 두 세기에 걸친 오랜 기간 일반 국민의 주택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경쟁적으로 낮은 금리로 충분히 공급해 오고 있기 때문에 전세 형태의 주택임대차 방식 따위는 애초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원리금을 상환할 소득만 있다면 누구나 은행에서 우대금리로 주택 가격의 80% 정도를 대출받을 수 있다. 즉,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 80%를 넘나든다는 뜻이다. 그 비율은 대출자가 원하면, 주택보험 구입을 전제로 100% 가까이 올라가기도 한다. 이러한 은행산업 덕분에 이들 국가에서는 민간 주택임대사업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월세 기준 주택임대차시장도 효율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국가의 국민은 전세로 주택을 임차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예를 들어 1억원을 가진 A가 매입 2억원, 전세 1억원의 주택에 거주한다고 해 보자. A는 전세 또는 1억원을 대출받아 매입을 선택할 수 있다. 전세의 경우 A는 1억원만큼 예금이자를 내야 한다. 매입의 경우 A는 1억만큼 대출이자를 지불한다. 이들 국가의 은행산업은 매우 경쟁적이라 예대금리차가 작기 때문에 양자 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따라서 여타 조건이 동일할 때 사실상 같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매입 대신 전세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세는 전세보증금 미상환 위험이 항상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채무자가 되기보다 더욱 싫은 게 신용도가 불확실한 상대에게 (전세보증금 같은 거액의) 돈을 빌려주면서 채권자가 되는 것이다. 은행에서 주택구입 자금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국민이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전세를 선택할 이유는 거의 없다. 만약 원리금 상환이 부담스럽다면 역시나 은행산업 덕분에 낮은 수준에서 형성되는 월세 가격을 기초로 주택을 임차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만 전세가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은행산업이 국민에게 주택 구입 자금을 풍부하고 저렴하게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행히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바뀐 게 없다. 자율적 은행 설립이 원천 봉쇄된 채 은행산업 과점체제는 강고하다. 그러니 예대금리차가 매우 큰 상황(유럽 대비 평균 0.5%포인트 이상)이 지속되면서 분기마다 은행의 과도한 이자장사 논란만 반복되고 있다. 몇 개 안 되는 은행마저 정부가 LTV 비율을 정하고 있는 터라 공급량도 제한적이다. 그렇다고 소위 제2금융권을 통해 고금리를 부담하면서 주택을 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마당에 민간 주택임대사업을 은행이 뒷받침하는 것은 생각조차 어렵고, 따라서 주택 임대차시장의 효율적인 형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앞으로도 많은 국민이 금융시스템과 동떨어진 채 주거 안정을 위해 각자도생 전세를 찾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전세사기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야만 할 것이다.

자율적인 은행 설립을 기초로 은행산업을 경쟁적·효율적으로 변모시키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할 것이란 뜻이다. 빌라왕이나 건축왕은 그저 전세사기의 종범이다. 임대차 3법 등도 주변 요인에 불과하다. 경쟁적·효율적이지 못한 은행산업이 전세사기의 진정한 주범이다.

서정의 한국은행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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