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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8·3 사채동결 조치 50년…책임 있는 기업이 국민 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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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정치와 기업, 공조와 긴장의 관계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기업인 여러분, 나는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모든 기업인은 정부의 의도와 국민의 여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성찰하고 올바른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여 이 조치의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앞장설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정부가 막대한 재정부담을 무릅쓰고 기업을 지원하는 이유가 기업의 이익만을 보장해 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 조치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기업인들의 노력과 자세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합니다.”

1972년, 즉 51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은 8·3 조치를 발표하면서 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세계 경제사정 악화나 정부의 지불보증, 국내 금융의 취약성 등 다양한 요인이 8·3 조치의 배경이 되었지만, 기업가의 부도덕성이 큰 요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2년 기업들 자금부담 덜어준 박정희, 도덕적 해이도 질타
인프라·강남 개발에 부동산 투기 극성…80년 경제위기 불러
신군부의 강압적 구조조정, 뒤로는 수천억대 정치자금 거둬
디지털 시대 대형재난 위험성도 커져…기업의 책임감 증폭

60년대 후반부터 부동산 투기 조사

1972년 8월 3일 기업 사채에 관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이른바 사채 동결 조치가 발동했다. 사채 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한 조치다. 은행에 붙은 관련 안내문을 시민들이 읽고 있다. [중앙포토]

1972년 8월 3일 기업 사채에 관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이른바 사채 동결 조치가 발동했다. 사채 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한 조치다. 은행에 붙은 관련 안내문을 시민들이 읽고 있다. [중앙포토]

정부는 이미 1960년대 후반 기업들의 부동산 투기를 조사해 왔다. 많은 기업이 부실기업이 되고 있었기에 청와대에 부실기업 정리를 위한 특별팀을 꾸렸고, 여기에서 부동산 투기를 조사했다. 그 결과 몇 개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정부의 특혜 속에서 차관이나 은행융자를 받았던 기업들의 부동산 투기가 드러났다.

더 큰 문제는 위장사채였다. “일부 기업들이 탈세 수단으로 위장사채를 보유하고 있는 현실은 선량한 기업의 보호뿐만 아니라 사회정화라는 견지에서도 마땅히 광정되어야 하겠습니다.”

당시 주력산업은 노동집약적 경공업이었다. 생산성이 높을 수 없었고, 부가가치는 낮았다. 한국 기업인들은 더 높은 이윤을 찾고자 했다. 해답은 위장사채였다.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명의로 자신의 기업에 사채를 주는 것이었다. 이자에 대한 세금을 내지도 않았다.

가족 명의로 돈 빌려주는 ‘위장사채’

사채 금리는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1년에 100%를 넘었다. 그렇다면 자기 회사에서 번 돈을 자기 회사에 투자해서 10%도 안 되는, 때로는 마이너스 수익을 보기보다 사채로 회사에 빌려줄 경우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금융실명제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기업으로서는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이었고, 해당 기업 주주들에게도 손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위장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면서, 면죄부를 주었다.

박정희의 경고에도 1970년대 말 또 한 번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 표면적으로 나타났던 사건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부정분양 사건이었다. 그러나 유신이 무너지고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나왔던 경제신문에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기사가 차고 넘쳤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의 부동산 투자가 경부고속도로 등 인프라 개발에 의한 것이었다면, 1970년대 말의 부동산 투자는 강남개발과 중동특수의 결합품이었다.

한국적 상황, 재벌의 본격 등장

10·26 사건이 아니었다면, 1980년의 경제위기 때 박정희가 무어라고 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일부 기업인들의 도덕적 해이를 봐줄 수 없다고 했을까. 아니면 한 번만 더 봐주겠다고 했을까.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던 이 시기는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던 시점이었다. 또한 1970년대 중반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로 일부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였다.

구조조정은 당시 한·미 간 정례 경제회의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 중 하나였지만,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과잉투자와 부동산투기로 부실해진 기업들은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군부는 박정희만큼이나 강력했다. 당시 10대 재벌 중 하나였던 국제그룹을 해체하였다.

부산에 거점을 두고 야당 정치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신군부의 강압적 조치에 저항할 수 없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군부는 망하게 할 기업, 그리고 조세 특혜를 주면서 망하는 기업을 인수할 기업을 선택했다. 본격적으로 한국적 기업 방식인 재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95년 신군부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군부가 재벌로부터 거둬들인 정치자금은 수천억에 달하였다. 신군부가 천문학적인 정치자금을 재벌들로부터 수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일부 기업인들의 부동산 투기를 비롯한 약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정주영씨가 노령에도 대통령 후보로 나설 생각을 했었을까.

인재로부터 시작된 재난사고

1972년과 1980년을 전후한 시기의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1997년의 경제위기에서도 일부 대기업의 도덕적 불감증은 변함없이 나타났다. 한보의 성장과 위기, 기아자동차를 둘러싼 논란은 모두 압축성장이 이루어진 한국의 대기업 성장과정에서 나타난 기업인들의 도덕적 자세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단지 경제위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재난사고와 근로자 생존 위기의 원인은 기업의 안전에 대한 불감증, 그리고 재정건전성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기업 활동을 감독하고, 공공사업을 발주하는 정부 측의 관리 소홀과 정경유착으로부터 발생하곤 했다.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그리고 최근의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 사건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관리 감독 부실, 부실한 기업의 무리한 운영, 비합리적 하청 관리 등이 사고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감독기관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규정을 지키지 않은 기업 역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고에 대한 처벌은 하급 관리자 몫이었다. 여러 논란에도 심각한 인재를 방지하기 위해서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위협받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최근 대형 항공사의 합병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한 항공사의 부실은 결과적으로 독과점적 대형 항공사의 탄생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해 부실항공사에 대한 인수 및 정상화가 늦어지고 있다. 항공사의 부실화가 누구의 책임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정상화가 늦어지는 과정에서 위험한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다.

착륙하기 전 비행기 문이 열리는가 하면, 비행기의 운행좌표를 승객들에게 표시하는 운항정보가 고장 난 상황에서 승객들에게 문제를 알리지 않고 운항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항공기 내 좌석 정비 불량으로 승객의 안전이 위협받기도 한다. 불안한 상황들의 책임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는 것은 어렵지만, 부실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기업의 부실과 불안정은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 저하로 연결될 것이다.

기업의 위기는 근로자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위협이 간다. 1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마불사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들이 모두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대기업의 부도를 그대로 방관할 경우 그로 인한 실업자 발생, 지역경제 침체는 곧 정치적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쌍용자동차 사태는 이 모든 상황의 종합세트였다.

기업 혁신과 발전에 진력해야

기업의 건전성 문제는 단지 기업인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다. 세계 경제의 흐름, 정부의 정책, 사회적 기반, 자연재해 등 다양한 사안이 기업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기업인의 도덕적 해이 역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다른 요소는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지만, 기업인의 태도는 인위적인 부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국가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기업의 활동이 필수적 요소이다. 그렇기에 기업에 대한 사회적 특혜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율·관세·법인세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기업인은 일반인이 받지 못하는 혜택을 받는다. 국민이 이를 이해하기에 사채 동결의 8·3조치도 가능했다.

국민은 기업인이 세계를 누비면서 기업과 한국의 위상을 높인 것을 모두 인정하기에 공적 자금의 투입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제 기업인이 답해야 할 때다. 기업인의 도덕적 해이에 의한 위험성은 과거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이버를 통한 경제공간은 국민경제에 전방위적 피해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1997년 이후 벤처에 대한 투자, 2008년 부동산으로 인한 세계 경제위기, 팬데믹 이후 현재 나타나고 있는 가상화폐 문제 등은 일부 기업인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환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산업 고도화와 자동화로 인해 관리와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대형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기업 혁신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기업인이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기업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기대해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