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연대 가능성 탐색한『인권현장』|유시춘『우산 셋이…』|염무웅<문학평론가·영남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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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 몇 해 동안 요란한 문학논쟁에 가려 작품창작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이를 벌충하기라도 하듯 금년 들어 좋은 소설집들이 잇따라 간행되고 있다. 며칠 전 출간된 유시춘의『우산 셋이 나란히』(푸른 나무)와 김하기의『완전한 만남』은 우리 민족문학이 거둬들인 최신의 중요한 성과로 주목에 값한다. 김하기에 대해서는 지난달 간단히 언급한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유시춘의 소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유시춘은 l973년 중편『건조지대』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그후 십 수년 동안 거의 작품활동이 끊어져 잊혀진 작가로 되었다. 그 동안 그는 무엇을 했던가. 작품집의 작가소개에 의하면 그는 고교 교사로 10여 년간 재직했으며 85년부터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과 민가협 총무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87년 6월 항쟁기간 중에는 운동본부의 핵심중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소설가로서 이런 경력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소재를 얻기 위해 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은 문학과 사회운동 모두를 모독하는 불순한 발상이지만, 현실 운동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뛰어다닌 경험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결실되지 말란 법은 없는 노릇이겠다.
과연 소설집『우산 셋이 나란히』는 전편에 걸쳐 교사이자 현장 활동가였던 그의 경험세계를 감동 깊게 반영하고 있다. 가령 표제작인「우산 셋이 나란히」는 70년대 중반 월남패망으로 시국이 잔뜩 긴장되어 있던 시절, 변두리의 어느 야간여고에서 이 학교에 갓 부임한 여교사 강진영과 운동권학생인 교생 김상빈, 그리고 가난하지만 착하고 바른 심성의 여고 생 최정순이 만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사회의 살벌한 분위기와 열악한 교육풍토가 실감 있게 묘사되는 가운데 상 빈은 구속되고 진영은 그를 숨겨 준 것이 빌미가 되어 학교를 떠나며, 정순은 진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졸업한 뒤 공장으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십 수년 뒤에 그들은 전교조 때문에 쫓겨난 해직교사와 외국인 기업체의 노조원으로 농성 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신분과 계층을 달리하는 이들의 만남과 정서적 교감을 통해 작가는 일종의 민중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 것 같다.
이보다 좀더 짜임새 있는 작품은 중편『멀고 먼 동행』이다. 여기에도 세 사람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데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동생을 둔 누이 영옥, 미국 유학 중 반체 인사와 접촉, 결국 고문 끝에 간첩죄로 둔감하여 무기징역을 받은 유학생의 아내 혜자, 그리고 노조활동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는 젊은이의 어머니 새말 댁이 그들이다. 이들은 눈이 쏟아지는 겨울날 시골 교도소로 면회를 왔다가 어울리게 된다. 면회는 금지되고 새말 댁의 지휘하에 전경들과 싸움을 벌이고 그러다가 어깨를 겯고 눈길을 함께 걷는다. 이러한 서술과정 속에 세 사람의 회상을 통하여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잔인한 고문의 실상이 생생히 묘사되는 것이다.
구속자의 가족들이 겪는 불안과 공포, 소외감과 절망감은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더욱이 간첩죄쯤 되면 같은 구속 자 가족들로부터도 경원되기 일쑤다.
그런데 이 모든 심리적 갈등과 격절 감이 새말 댁의 지도하에 면회투쟁을 벌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극복되고 이들 사이에 도리어 따뜻한 인간적 신뢰와 동지적 결속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작가가 겨냥하는 것은 탄압과 착취, 외세지배와 파쇼 권력에 맞선 민중적 연대의 가능성인 듯하다.
유시춘의 소설은 물론 아직도 구성의 산만성, 보고문학적 생경함, 그리고 얼마간의 작위성 등 일정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인권현장을 이만큼 가까이서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도 흔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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