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고통…구조 받지 못한 사람들③] 경제범죄 피해지원 가능할까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5년 간 범죄로 생명이나 신체에 피해를 입은 국민은 164만 4466명입니다.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헌법 30조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ㆍ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상당수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손길은 신기루처럼 다가옵니다. 갑자기 덮친 불행의 늪에서 구조받지 못한 채 ‘두 번째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경기도 수원에 사는 권모(37)씨는 재작년 결혼식을 올렸지만, 반년 넘게 아내와 같이 살지 못했다. 전세사기 때문이다. 신혼 생활을 할 보금자리에 입주하려면 전세 자취방 보증금 6500만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깡통 전세였던 자취 방을 정리할 때까지 지루한 경매 과정을 지켜보며 발만 굴러야 했다. 권씨는 “전세 보증금 중 약 3000만원 정도를 돌려받지 못했다”며 “이미 소송비로만 6000만원 넘게 지출했다”고 말했다. 권씨 부부가 꿈꿨던 신혼 생활과 미래는 나쁜 임대인 탓에 산산이 부서졌다.
경제범죄 피해자 다수가 비슷한 고통을 겪는다. 가족이 흩어지거나, 직장을 잃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경제범죄 자체로 몸이 상하거나 죽음에 이르진 않지만, 끝내 생명을 잃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식품 제조공장에서 일하던 임모(26)씨는 지난달 14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자택은 인천 미추홀구.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린 남모(61)씨의 전세 사기 피해자 중 한명이었다.
임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2019년 8월 전세금 6800만원짜리 연립주택을 계약했다. 당연히 투자 목적은 없었다. 살기 위해 집을 찾았고, 비록 전세지만 살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뛸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행복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뒤 임씨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망 당시 임씨의 지갑에 남은 돈은 2000원이었다.
“사기도 강력 범죄만큼 고통…사인 간 문제 아니다”
임씨 전에도 이후에도, 같은 지역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이어졌다. 이들과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결과적으로 강력범죄 피해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범죄피해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범죄피해자 보호법은 국가가 구조에 나서야 할 대상을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ㆍ신체에 피해를 받은 사람’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등의 경제범죄는 피해자 지원 대상 범죄에 포함되지 않는다. 민간이 국고 보조와 기부금으로 운영하는 피해자지원센터(센터)의 지원 대상도 강력범죄와 성범죄 피해자 등으로 제한돼 있다.
2019년 9월 ‘서민지원 대출’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해 4200만원을 날린 이모씨는 피해 회복을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범죄피해 회복 지원은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자신이 돈을 부친 계좌 명의자들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이들은 명의자일 뿐 돈을 가져간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씨 측 변호사는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범죄에선 피해자가 돈을 최종적으로 가져간 범인을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며 “민사소송을 해도 남는 건 소송 비용 부담 뿐”이라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권씨는 “재산 범죄도 강력범죄 못지않게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지원을 확대했으면 한다”면서 “돌아가신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심리 상담 지원이라도 이뤄졌다면 극단적 선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미 미추홀구전세사기대책위원회 위원장도 “전세사기는 사인간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만들어 놓은 제도 안에서 믿고 계약했는데 전재산을 날린 것에는 정부의 책임도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예산·형평성·도덕적 해이…현실적 제약 많아 논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전세사기나 코인투자 사기 등 등 피해범위가 광범위하고 개별 피해액도 큰 범죄들이 일상화되고, 이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는 피해자가 늘면서 경제범죄 피해자에 대한 지원책도 본격적으로 논의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투자사기 등과 달리, 보이스피싱과 같이 범죄의 원인을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나 선택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적 재난’의 성격을 띤 경제범죄도 많기 때문이다.
한상희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전세사기 등 경제범죄 피해자도 당연히 범죄피해자”라며 “국가에서 전세라는 경제 제도를 관리하면서 이런 사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방치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IMF 위기 당시 은행과 기업에 공적자금을 투입했듯, 정부가 서민들의 피해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 역시 “전세사기 사태와 같은 대규모 경제범죄가 발생에는 정부가 부동산 정책의 갈피를 못잡은 책임도 있다”며 “국민들이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경제범죄의 경우 정부 예산의 제약과 가해자 및 피해자를 분리하는 문제의 곤란, 그리고 형평성 논란 우려 등이 늘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특히 투자나 거래를 매개로 이뤄지는 범죄의 경우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적극적 참여자와 수동적 피해자 등을 명확히 가르기도 어렵다. 피해 규모가 50조원에 달하는 ‘테라ㆍ루나 사태’의 경우에도 코인 발행자들의 고의성이 쟁점 중 하나며, 수사가 진행 중인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발 주가 조작 사태’에서도 다단계 방식의 판매 과정에서 증권사들의 책임과 투자자들의 자발성 여부를 두고 ‘투자자인지 피해자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재산범죄 피해자에 대한 구제가 미약하다는 아쉬움은 늘 있지만 피해액을 추산하는 것도 어렵고 피해를 전부 국가 예산으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며 “피해자가 투자 목적으로 참여했다 피해를 입는 ‘이욕 범죄’의 성격도 있어 일률적 구제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전세사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관점의 의견이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에서 채권 매입을 해주는 형식의 보상은 다른 일반 갭투자자들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맞지 않는다”며 “당장 피해자들이 거주지를 마련할 수 있게 무이자 대출을 지원하는 정도가 적절해 보인다”고 말했다.
“가해자 책임 물어 예산 확보해야”
변화하는 범죄 양상에 맞춰 일부 경제범죄에 대해서도 지원이 가능하도록 법적 구조 대상을 확대하고 예산을 늘리려 해도 필연적으로 형평성 문제, 도덕적 해이 등의 논란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경제범죄 피해 회복을 도우려면 피해자에게 지원할 돈을 가해자에게서 환수하는 과정이 지금보다 크게 활성화하는 과정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 등 범죄 수익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알기 어려운 사기 범죄에 대해 기소 전 몰수·추징 보전이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가해자에 대한 정부의 구상권 청구 의지도 낮은 편”이라고 지적한다. 2019년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5년간 국가가 범죄피해자에게 지급한 구조금 456억 중 범죄자에게 받아낸 금액은 35억원으로, 7.7%에 불과했다. 한 센터 관계자는 “구상권 소송은 한 건당 최소 6개월 넘게 걸리는데 담당 법무관들은 보통 1년이면 다른 지검으로 전출된다”며 “시한이 지나면 서류를 없애고 덮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안성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범죄수익 환수가 제대로 이뤄져야 피해자들에게 주는 지원금 예산도 늘릴 수 있지만 그동안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라며 “법무부에 구상권 청구 전담 부서를 만드는 등 보다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