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동생 사망 사건 재판, 법원 도착하니 일정 바뀌어 있어" [두번째 고통②]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두 번째 고통…구조 받지 못한 사람들②] 소외된 범죄 피해자

 범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부터 5년 간 범죄로 생명이나 신체에 피해를 입은 국민은 164만 4466명입니다. 범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헌법 30조는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ㆍ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상당수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손길은 신기루처럼 다가옵니다. 갑자기 덮친 불행의 늪에서 구조받지 못한 채 ‘두 번째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김모(53)씨는 지난해 5월 막내 동생을 잃었다. 동생은 평소 의처증이 심해 자주 폭력을 일삼던 남편에게 살해 당했다. 수사 결과 김씨의 동생은 남편을 피해 집 밖으로 도망쳐 나와 차안에 숨었지만 쫓아온 남편은 보도블럭 조각으로 차 유리창을 깨고 아내를 끌어냈고, 흉기로 수차례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 A(41)씨의 유골함. 이 사건으로 넷째 동생을 잃은 김모(53)씨는 재판 때문에 울산을 오가면서 마음 고생을 해야 했다. 김씨는 재판장에게 ″내가 피해자인데 가해자 같은 느낌이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족 제공]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 A(41)씨의 유골함. 이 사건으로 넷째 동생을 잃은 김모(53)씨는 재판 때문에 울산을 오가면서 마음 고생을 해야 했다. 김씨는 재판장에게 ″내가 피해자인데 가해자 같은 느낌이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족 제공]

죽은 동생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분식집을 열었다는 김씨는 동생을 살해한 매부의 재판을 보기 위해 자신이 사는 울산에서 1ㆍ2심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가게를 접고 순천ㆍ광주로 향했다. 강원도 속초 등 더 먼 곳에 사는 가족들도 재판 전날 김씨의 집에서 묵고 함께 법정에 나가곤 했다. 생계를 뒤로 한 채 떠난 먼길이지만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도착하니 재판 일정이 바뀌어 있기도 했고, 당일 가해자 측 요청으로 피의자 심문이 비공개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었다.

김씨는 “태풍이 올 때도 전날 법원 근처 모텔에서 자고, 너무 힘들어 ‘이러다 길바닥에서 내가 죽는 거 아닌가’ 싶은 날도 있었다”며 “피해자인데 가해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든 과정이 가해자 중심이라 재판만 갔다 오면 분노 조절이 안됐다”고 말했다. 실제 많은 피해자가 “법정에 범죄 피해자의 자리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가해자 중심 재판 과정에 힘 빠져”… 배제된 피해자  

범죄 피해의 고통은 중층적이다. 사건 직후 가장 시급한 건 경제적 지원이지만, 가장 오래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건 뒤늦게 찾아오는 소외감과 고립감 등 심리적 고통이다. 남은 가족들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먹고 살길을 찾지만 가해자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며 답답함과 억울함이 되살아나고, 이마저 견디면 이번엔 상실감과 함께 트라우마가 찾아오는 식이다. 각 과정마다 지원 제도가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수사기관과 가해자간 공방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는 아예 소외되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런 답답함과 억울함은 결국 마음의 병이 되지만 심리 치료 지원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지적이 계속 된다. 2차 가해나 추가 범죄로 부터 피해자를 지키는 체계도 여전히 허술하다.

지난해 4월 봉사활동 중 범죄 피해를 당한 요양보호사 김모(73)씨 역시 “사건 진행 과정을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2차 가해가 무엇보다 괴로웠다”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노인을 돕기 위해 방문했는데, 돌봄 대상자가 ‘내 말을 안 들어준다’며 싱크대에 있던 흉기로 김씨의 등을 찔렀다. 의사는 “0.5㎝만 더 깊이 들어갔어도 숨졌을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 사건 이후 김씨는 자다가 깜짝 놀라 깨는 버릇이 생길 정도의 공포감에 시달렸다.

가해자에겐 아직 처벌조차 내려지지 않았다. 김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재판이 열릴 거라더니 계속 미뤄지고 있다”며 “3월에 한다던 재판이 왜 안열리는지 물어봤지만 또 미룬다는 일방적 통보만 돌아왔다”며 “지금까지 어떤 기관도 사건 처리 과정이나 재판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사이 동네에선 “왜 혼자 사는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그런 일을 당하냐”는 말들이 돌았다.

“정보 제공, 안전과도 밀접… 피해자 재판 참여 가능해야”

 한국피해자학회는 2021년 “범죄피해자에 대한 정보 제공 또는 정보접근권은 피해자에게 사건의 진행 상황을 충분히 숙지하여 차후에 있을 수 있는 피해자의 인격권 침해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 있게 하는 전제 요건이 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가해자에 관한 정보는 피해자의 안전 도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정보 소외 문제가 피해자의 자기방어권 상실로 이어지는 사례가 빈번하다. 2021년 딸이 피살당한 홍모씨는 사건 발생 얼마 후 가해자 측 변호인에게 딸이 생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넘겼다. 그는 “나는 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변호사가 자꾸 달라고 재촉하니 줘야 하는 건 줄 알았다”고 말했다. 홍씨는 나중에 경찰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런 행동이 불법이며, 가해자를 오히려 돕는 것일 수 있다는 걸 알게됐다.

전문가들은 범죄 피해자도 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피의자에게만큼 피해자에게도 형사사법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범죄 피해자나 아동 피해자 등 일부 사건에만 운영하는 범죄피해자 국선대리인제도를 몇몇 선진국처럼 범죄 피해자 전체에게 확대해 법률적 지원을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안성훈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피해자가 직접 재판에 참여해 피고인에게 질문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범죄피해자가 증인이 아닌 경우에도 가해자 처벌 등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게 ‘범죄피해자 의견진술제도’가 생겼지만, 실제 의견진술이 이뤄지는 사건은 1000건에 3건 꼴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마음의 병은 평생인데 심리 치료는 일시적…지역마다 편차도

 범죄피해자지원센터(센터) 등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정신없이 재판을 끝내고 나면, 다시 극심한 심리적 고통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고통은 짧아야 수년, 길면 평생을 가지만 심리 치료 지원은 일시적이다.

자신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이웃에게 강간ㆍ상해를 당한 A(72)씨는 피해를 입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있다. 끔찍한 일을 겪은 A씨는 피해 당시가 자꾸 떠올라 보증금에 200만원을 더 얹어주고 황급히 동네를 떠났다. 병원비를 지원받아 몸은 어느 정도 치료됐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때에 머물러 있다. 그는 “자다가 악몽을 많이 꾼다. 남자들이 나를 어떻게 하려고 하는 꿈. 꿈에서 깨고 나면 가슴이 뛰고 신경안정제도 계속 먹지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살인 사건으로 엄마를 잃은 B양도 한동안 스마일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10회만 지원되는 심리치료 기간이 끝나고 나서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41)가 살아생전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건 발생 당시 초등학생이던 피해자의 큰딸은 한동안 스마일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나 마도 심리치료 기간이 너무 짧았고,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심리 치료를 마저 끝낼 수 있었다. [독자 제공]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 피해자(41)가 살아생전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건 발생 당시 초등학생이던 피해자의 큰딸은 한동안 스마일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나 마도 심리치료 기간이 너무 짧았고, 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심리 치료를 마저 끝낼 수 있었다. [독자 제공]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으로 엄마를 잃은 아동이 그린 그림. 해당 아동은 양육을 주장하는 친할머니쪽으로 주거지를 옮겼다가 제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위센터의 위기아동으로 지정돼 상담을 받았다. [유족 제공]

여수 주차장 살인사건으로 엄마를 잃은 아동이 그린 그림. 해당 아동은 양육을 주장하는 친할머니쪽으로 주거지를 옮겼다가 제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위센터의 위기아동으로 지정돼 상담을 받았다. [유족 제공]

이들처럼 일시적인 심리치료로 병이 낫지 않은 피해자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 방법을 찾는다. 센터의 자조모임 등에서 다른 피해자들과 만나 얘기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피해자들도 많다. A씨는 최근 센터에서 진행하는 힐링팜 프로그램에 나가 농사를 지으며 상처를 치료하고 있고, B양은 이모가 센터에 도움을 호소해 추가 심리 치료를 받았다.

지난 3월 21일 오전 10시 안양범피센터 자조모임에서 '힐링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범죄피해자 8명 가량이 감자 심기 행사에 동참했다. 행사에 참여한 한 범죄피해자는 ″끔찍한 일을 겪은 후 날마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든다. 이 모임에서 피해자들과 이야기하고 농사 지으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고 말했다. [황예린 기자]

지난 3월 21일 오전 10시 안양범피센터 자조모임에서 '힐링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범죄피해자 8명 가량이 감자 심기 행사에 동참했다. 행사에 참여한 한 범죄피해자는 ″끔찍한 일을 겪은 후 날마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든다. 이 모임에서 피해자들과 이야기하고 농사 지으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됐다″고 말했다. [황예린 기자]

다른 피해자들 역시 자조모임을 통해 함께 김장을 담그기도 하고, 나무를 심고, 악기를 배우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10회 심리 치료’로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다. 지난 3월 열린 안양센터 자조모임에는 8명의 범죄피해 유족들이 참여해 감자 심기 행사를 진행했다. 참석자 C씨는 3년 전 데이트 폭력과 이어진 살인으로 목숨같이 여기던 딸을 잃었다. 그는 “자식도 궁합이 있다는데 걔랑은 궁합이 말도 못했어. 난 걔 없으면 못 살았으니까”라며 눈물을 흘렸다. 딸을 잃고 한참을 무기력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C씨는 자조모임을 통해 조금씩 세상과 화해하고 있다. C씨는 “딸을 잃고 2년 뒤에야 연락을 받아 모임에 왔다.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비슷한 고통을 겪은 모임 회원들이 가족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피해자들이 이들처럼 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민간이 지역별로 운영하는 센터의 예산은 법무부 지원금과 기업 후원금, 지자체 지원금 등으로 구성돼 센터마다 프로그램의 질적·양적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지방의 한 센터 사무국장은 “수도권에 비해 지방은 자원이 열악한 편”이라며 “피해자들이 받는 지원 수준을 비슷하게 하려고 신경 쓰지만 지자체가 넉넉하지 않다보니 항상 예산 걱정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