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 외환은행 매각계약 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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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이 22일 "우리는 (국민은행과의 외환은행 재매각) 계약을 종결하는(terminating)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다.

FT는 그레이켄 회장의 이 발언을 인용하면서 외환은행 매각 계약의 파기가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FT는 또 계약 파기 결정은 며칠 안에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검찰이 론스타 본사 임원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한 뒤 론스타는 "매각 협상이 무산될 수 있다" "재매각 논의는 보류 중" 등으로 발언 수위를 높여 왔지만 계약 파기라는 카드를 공식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융계 관계자들은 "론스타로선 이익을 극대화하는 차원에서 계약 파기 카드를 검토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론스타의 속내는=그레이켄 회장이 17일 밝혔듯 현재 론스타와 국민은행 간의 협상은 '보류 중'이다. 5월 맺은 본계약에 따라 대금 입금만 남겨두고 있지만, 사실은 이에 앞서 금융감독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금감위나 공정위는 현재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론스타와 국민은행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론스타로선 엘리스 쇼트 부회장과 마이클 톰슨 이사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도 부담스럽다. 이들과 론스타 펀드가 한국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앞으로 미국 내에서 투자자를 모을 때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론스타 입장에선 이런 교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카드가 계약 파기다. 계약을 파기할 경우 내년 초 외환은행 배당을 통해 1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현금을 가져갈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투자 이익금을 투자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펀드의 속성상 언제까지 외환은행을 쥐고 있을 순 없다. 외환은행 매각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수조원의 현금을 퍼부어 한국의 은행을 살 수 있는 여력을 가진 곳은 많지 않다. 돈은 있어도 자격이 문제될 수 있다. 일단 론스타 같은 펀드는 외환은행을 살 수 없다. 지난번 매각협상 때도 싱가포르의 DBS가 금융 주력사가 아니란 이유로 배제됐다. 금감위 고위 관계자는 "앞으로 은행 매각 때 대주주 자격에 대한 심사가 한층 엄격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국내외 은행 중에서 새 인수자를 찾아야 한다. 국내엔 국민은행과 함께 외환은행 인수를 희망했던 하나은행이 있지만, 론스타가 불법행위 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 외환은행 인수가 어렵기는 하나은행도 마찬가지다. HSBC 등 외국 은행들은 외환은행처럼 덩치가 큰 곳을 인수하길 꺼리는 편이다.

이에 대해 금융계 관계자는 "운신의 폭이 없어 답답해진 론스타가 일단 극단적인 카드를 내놓은 것 같다"며 "당장 계약을 파기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론스타가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본 뒤 최종 입장을 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론스타 사태의 득실=검찰 수사와 시민단체의 '국부 유출' 주장은 현재까지 론스타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상황에 맞춰 이번 사태의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오히려 국부 유출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우선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론스타의 불법행위를 찾아내 상황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외환은행을 팔기 전 시점으로 되돌아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무효화해 당시 금액만 주고 주식을 되돌려 받기는 어렵다.

또 론스타가 국민은행과의 계약을 파기한 뒤 배당을 통해 일단 투자원금을 회수하고 2~3년 뒤 매각을 재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엔 외환은행의 매각가격이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외환은행이 계속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UBS증권은 외환은행의 주당순자산가치가 현재 9725원에서 내년 말엔 1만1500원으로 늘어나고 배당 여력도 올해 말 2조2000억원에서 내년 말엔 2조8000억원으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때 가서 외환은행을 인수하려는 국내투자자는 더 비싼 가격을 치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국부 유출 주장 때문에 시간을 끌다가 되레 더 많은 국부가 빠져나가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이상렬.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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