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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신 물 심자" 특별한 산불 묘책…서울대의 이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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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산 곳곳에 나무 대신 물을 심는 겁니다. 그러면 주변 토지 전반적으로 습도가 올라가고, 유사시에는 초기 산불 진화용수로도 쓸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나 실화‧방화로 인한 산불은 계속되는데 특별한 묘책도 없다면, 이제 다른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지난 5일 비가 내린 뒤 물이 고인 관악산 보덕사 인근 물모이의 모습. 오전 11시쯤 약 30cm 높이까지 물이 찼다. 김홍범 기자

지난 5일 비가 내린 뒤 물이 고인 관악산 보덕사 인근 물모이의 모습. 오전 11시쯤 약 30cm 높이까지 물이 찼다. 김홍범 기자

지난 5일 서울 관악산에서 만난 한무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는 숲 한켠의 작은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한 교수가 나무ㆍ흙ㆍ돌 등을 모아 만든 물웅덩이, ‘물모이’였다.

식목일인 이날은 오랜만에 내린 비로 지난 2일부터 이어진 크고 작은 산불이 잦아들었지만, 이미 나흘간 축구장 약 4400개 면적(3091haㆍ헥타르)의 숲이 피해를 봤다. 매해 봄마다 대형 산불이 잇따르고, 이를 막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 역시 매해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가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바로 물모이 실험이다. 임상준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 연구팀은 국립산림과학원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1월 농업생명과학대학 부속 관악수목원 안에 물모이 1개를 시범 설치했다. 연구팀은 물모이 주변 토양의 수분량과 미세 기상 변화를 살펴 물모이의 효과와 산불 예방 실효성을 평가하고 있다. 이달 중에는 첫번째 물모이 인근에 물모이 1개를 추가로 설치해 효율적인 형태와 배치, 구성 재료 등도 분석할 예정이다. 숲속에 물모이가 다수 설치되면 산 전체의 습도가 높아져 산불을 예방하는 효과가 생길 것으로 연구팀은 기대하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형 산불 덮친 슬로바키아, 물웅덩이 만들어 산불 예방에 활용

인위적으로 물웅덩이를 만들어 산불 예방에 활용하기 시작한 나라는 슬로바키아다. 지난해 4월 5일 한국을 방문한 슬로바키아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크라빅 박사는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식목일 긴급토론회에서 산림이 빗물을 머금게 하는 방법으로 산불을 극복하고 있는 유럽의 사례들을 전했다. 그는 지난 2005년 발생한 대형 산불로 약 1만2000ha의 산림을 잃은 슬로바키아가 이후 10만개 이상의 물모이를 만들어 대형 산불의 발생을 막고 있으며, 산림 1ha당 400~670만원의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 3일 오후 전남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 한 야산에서 불이 나 군 헬기가 진화에 투입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일 오후 전남 함평군 대동면 연암리 한 야산에서 불이 나 군 헬기가 진화에 투입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대의 다른 연구팀은 이 같은 사례를 참고해 조만간 더 큰 규모의 실험을 진행한다. 슬로바키아의 초소형 웅덩이(water retention measure) 사업을 보고 처음 ‘물모이’란 용어를 만든 한무영 교수를 중심으로 다음달부터 환경재단과 함께 강원 삼척의 산지에 물모이군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연구팀은 총 3ha 면적의 산지에 가로폭 3~4m, 높이는 0.5~1m 크기의 물모이 약 30개를 설치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다수의 물모이를 설치해 ‘물모이군’을 만들고 산불 예방의 실질적 효과를 측정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교수는 “물모이 설치 사업은 적은 투자 비용으로 산지 내에서 물 순환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어서 그 수가 일정 이상 모여야만 실질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이번 시범 사업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120km²의 산림을 잃은 슬로바키아에서 물모이를 만들고 있다. 사진 한무영 교수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120km²의 산림을 잃은 슬로바키아에서 물모이를 만들고 있다. 사진 한무영 교수

헬기·차량 접근 속도가 핵심… “물모이 효율성 검증 안됐다” 우려도

그러나 일각에선 물모이의 실효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아직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급하게 받아들일 경우 자칫 기존의 산불 대응 체계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산림청 관계자는 “지금 당장은 헬기와 화재 진압 차량 등의 장비가 얼마나 빨리 산불 현장에 접근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며, 그 속도를 높이는 게 산불 대응 정책의 핵심”이라며 “초기 진화도 중요하지만, 강원도의 경우 바다가 없으면 일본까지 불이 번질 거라는 말이 있을 만큼 바람이 강해서 초기 진화 활동에 한계가 있다. (물모이가) 효율적일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산림청 관계자도 “현재 초기 진화에 사용하는 등짐펌프는 흙탕물을 빨아들이지 못해서 물모이에 있는 물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으면 진화대원이 물이 있는 줄 알고 물모이에 갔다가 허탕을 칠 수도 있어 아직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선 안된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11월 경기 안양시 서울대 관악수목원에 설치된 물모이. 서울대는 이번 달 내로 하나의 물모이를 추가 설치해 주변 토지 수분도 등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사진 서울대 산림과학부

지난해 11월 경기 안양시 서울대 관악수목원에 설치된 물모이. 서울대는 이번 달 내로 하나의 물모이를 추가 설치해 주변 토지 수분도 등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다. 사진 서울대 산림과학부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도 “적은 비용으로 다수의 취수원을 만들자는 취지지만, 결국 계속 유지하려면 누군가가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또 건조한 봄철에 잠시 산중에 빗물이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효과를 볼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물모이 실험에 나선 서울대 연구팀 역시 이런 우려를 알고 있지만, 결과에 따라선 적은 돈으로 예방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얻게 될 수 있을 걸로 기대하고 있다. 임 교수는 “진행 중인 실험은 산불을 예방하는 보조적 수단으로써, 다른 대응 체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부작용 없이 물모이를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며 “다양한 평가 지표를 적극 활용해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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