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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벚꽃비에 마냥 웃지 못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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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 디렉터

최현철 사회 디렉터

4월의 첫날, 아내와 함께 오른 서울 서대문 안산에선 꽃축제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숨은 벚꽃 명소라는 명성에 걸맞게 들머리 길이름부터 '안산 벚꽃길'이다. 500m 남짓한 벚꽃길 끝에 자리한 연희숲속쉼터를 가득 채운 벚나무들이 터뜨린 꽃잎은 불꽃놀이 정지화면을 보는 듯했다. 산 정상 봉수대에서 보이는 동쪽 건너편 인왕산 자락의 모습은 덤이다. 암벽 밑으로 진노랑 개나리와 연분홍 벚꽃이 두툼한 띠를 이룬 게 새색시 치마에 곱게 수놓은 문양 같았다.

산불·가뭄 등 기후위기 눈앞에 #점점 멀어지는 탄소감축 계획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하다지만…

3월 26일 진해군항제가 한창인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 공원에서 전국에서 몰려든 상춘객들이 활짝 핀 벚꽃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으며 봄놀이를 즐기고 있다. 올해 군항제는 4월3일 막을 내렸다. 송봉근 기자

3월 26일 진해군항제가 한창인 경남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 공원에서 전국에서 몰려든 상춘객들이 활짝 핀 벚꽃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으며 봄놀이를 즐기고 있다. 올해 군항제는 4월3일 막을 내렸다. 송봉근 기자

이날 경남 창원에선 한 주 전 시작된 군항제가 절정을 맞고 있었다. 열흘간 진행되는 군항제가 끝날 무렵부터 북쪽으로 올라오며 차례차례 피는 것이 벚꽃 개화의 기존 공식이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3월 기온이 급격히 오르면서 전국의 봄꽃이 거의 동시에 만개하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올해 벚꽃은 평년보다 16일이나 이른 3월 25일 개화했다. 개나리가 2주, 배꽃과 복숭아꽃은 거의 3주가량 빨리 피었다. 여의도 윤중로를 비롯해 서울의 주요 벚꽃 축제는 이번 주말로 잡혀있는데, 주중에 비가 온다니 벚꽃엔딩부터 먼저 부르게 될 공산이 커졌다.

기상청 분석 자료에 따르면 21세기 후반쯤에는 한반도의 봄꽃 개화시기가 2월 말로 더 당겨질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땅속에서 뒤늦게 나온 야생벌은 먹이가 없는 황당한 상황에 부닥친다. 꽃과 벌의 활동 불일치는 수분(受粉)을 어렵게 해 열매가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온난화와 그에 따른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작은 단면이다.

2일 오후 산불이 발생한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서 경찰 헬기가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오후 산불이 발생한 서울 종로구 인왕산에서 경찰 헬기가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뭄도 마찬가지다. 올해 들어 서울의 무강수일은 79일, 남부 지방은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해 정도가 더하다. 전국의 산은 불씨만 있으면 활활 타오를 불쏘시개 같은 상태다. 안산을 다녀온 다음 날에만 전국적으로 34건의 산불이 발생했다. 역대 3위의 기록이다. 이날 서울 인왕산에서도 큰불이 났다. 주민들이 대피하고, 진화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하루 전 보고 온 곳에서 그런 일이 났다는 소식에 멀어 보이던 산이 눈앞으로 훅 다가오는 듯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달 20일 발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6차 평가보고서는 이렇게 개인적이고 생경한 느낌이 앞으로 더 자주, 더 광범위하게 발생할 것이란 경고를 담고 있다. IPCC는 산업화 이전 시기보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 높아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해왔다. 전문가들은 기온 상승이 탄소와 메탄 같은 온실가스 탓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이미 1.1도가 오른 상태여서 더 촉박하다. 이런 위기감을 바탕으로 각국 정부로부터 스스로 탄소를 감축하겠다는 계획서를 받아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런데 6차 보고서의 결론은 이전보다 암울해졌다. 각국이 제출한 탄소 감축안을 성실히 지켜도 2030년에 1.5도를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는 전망이다. 물론 이마저 지키지 않으면 4.5도나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결과는 더 지독한 폭염과 혹한, 더 크고 오랜 가뭄과 폭우, 높아진 해수면, 가팔라진 생물 멸종, 쪼그라들 곡물 생산 등이다.

보고서 내용은 심각한데 곳곳에 희망의 메시지도 있다. 각국 정부가 추가 감축에 합의한다면 지구 온도 상승을 1.5~2도에서 막아낼 수 있다는 기대다. '적응과 완화'라는 새 용어를 동원해 타협 가능성도 제기한다. 기후위기 담론은 적어도 묵시록이나 종말론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6차 보고서 작성을 진두지휘한 이회성 IPCC 6대 의장은 2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겁을 줘서 이산화탄소를 감축할 수 있다면 지구 온난화는 벌써 해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각국 정부는 이미 제출한 계획도 지키지 못할 상황을 만든다. 기후 선진국이라는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천연가스 공급이 여의치 않자 중단했던 석탄 발전소를 재가동했다. 한국 정부도 지난달 21일, 2030년까지의 국가탄소감축목표(NDC) 달성을 위한 세부 이행계획을 대폭 수정한 안을 발표했다. 2029년까지 미미하게 줄이다 2030년에 목표치만큼 확 떨어뜨리겠다는 게 골자다. 산업부문 감축을 줄이고 재생에너지와 탄소포집 목표치도 높였다. 당장 먹고 사는 게 더 급하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읽힌다.

이 의장은 “예산을 넘겨 돈을 쓰면 빚을 지고 이자를 부담하게 되듯이, 이산화탄소도 정해진 한도를 초과해 배출하면 '지구 온도 상승'이라는 이자를 부담하게 된다”라고까지 했다. 경고의 의미지만, 다급한 현상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당장 끼니를 때울 수 없는 사람은 이자 걱정보다 굶지 않을 궁리를 하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6차 보고서는 희망가보다 묵시록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