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 개입설에 일파만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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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영국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 정보기관 출신 장교를 독살하려 한 사건의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 크렘린(러시아 대통령궁)과 러시아 정보기관이 개입돼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영국 방첩기관이 수사에 착수하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옛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러시아연방보안국(FSB) 대령 출신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판하다 영국으로 망명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44.사진)가 독극물 중독 증상으로 입원한 건 1일. 지난달 피살된 반(反)정부 성향의 러시아 여기자 안나 폴리트콥스카야 사건을 추적해 오던 그가 이 사건 관련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이탈리아인을 만나 식사를 한 뒤였다.

런던의 한 일식집에서 여기자 살해 사건 용의자 명단이 담긴 서류를 건네받은 리트비넨코는 집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용의자 명단에는 리트비넨코도 알고 있는 FSB 장교들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건강했던 리트비넨코는 머리가 모두 빠지고 내장기관이 심하게 손상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의료진은 "그가 독성이 강한 중금속 탈륨에 중독된 것으로 보인다"며 "혈액 속에서 허용치의 세 배에 달하는 탈륨 성분이 추출됐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탈륨이 KGB를 비롯한 세계 정보기관들이 인명 살상용으로 자주 사용해 온 독극물"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 정보기관이 숨어 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리트비넨코의 FSB 동료인 알렉산드르 골드파르브는 20일 "이번 사건은 크렘린이 지원하는 러시아 정보당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며 리트비넨코가 푸틴 대통령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 온 인물 중 한 명이란 점을 상기시켰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195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르 제거 이후 그러한 작전은 하지 않는다"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벌이던 반데르는 KGB에 의해 청산칼리가 든 캡슐로 독살당했다.

리트비넨코는 99년 FSB에서 퇴직한 뒤 2000년 영국으로 망명, 런던에 거주해 왔다. 그는 푸틴에 반대하다 영국으로 망명한 기업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살해하려는 러시아 정보기관의 음모를 폭로한 뒤 런던으로 도망갔다. 2002년 자신이 쓴 '러시아 폭파하기:내부로부터의 테러'란 책을 통해 "300여 명이 숨진 99년 모스크바 아파트 폭발 테러 사건이 체첸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FSB가 꾸민 자작극"이라고 주장, 크렘린의 심기를 한껏 긁어놓았다.

2004년 말 친서방 성향을 보이던 빅토르 유셴코 당시 우크라이나 대선 후보에 대한 독살 기도 사건 때도 "러시아 FSB의 사주를 받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의 공작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 크렘린의 '공적 1호'로 떠올랐다. 리트비넨코는 지난달 영국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번 사건이 외교 스캔들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영국은 러시아 당국의 개입 사실이 확인될 경우 강력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런던경시청에 이어 영국 방첩기관인 MI5가 사건 수사에 착수했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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