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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 학살' 기대한 푸틴 실망? '아마겟돈 장군' 석달만에 잘랐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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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장의 세르게이 수로비킨(57) 러시아군 총사령관이 임명된 지 석 달만에 경질됐다. 수로비킨은 민간인 무차별 학살 등 잔혹함으로 악명 높아 '인류 최후의 전쟁'에 빗댄 '아마겟돈 장군'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이로써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군 총사령관 교체는 이번까지 벌써 네 번째다.

11일(현지시간) BBC 등에 따르면 러시아 국방부는 지난해 10월 총사령관에 올랐던 수로비킨을 부사령관으로 강등하고, 이 자리에 러시아군 최고 지휘관인 발레리 게라시모프(68)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을 겸직시켰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번 인사와 관련해 "더 높은 직급에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칭하는 용어)'을 맡겨 각 부대의 활동을 긴밀하게 조정하고 모든 병참 지원의 효율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전 총사령관 겸직 임명을 받았다. 사진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AFP=연합뉴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전 총사령관 겸직 임명을 받았다. 사진은 지난달 모스크바에서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AFP=연합뉴스

하지만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선 다른 이유가 거론된다. 수로비킨이 우크라이나의 발전소 등 민간 사회기반시설을 집중 타격해 우크라이나의 사기를 일시적으로 꺾는 데는 성공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바라는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진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를 두고 "교착 상태에 빠진 우크라이나 전장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했다.

당초 수로비킨은 민간인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잔혹한 전술로 전황을 반전시킬 인물로 기대됐다. 그는 지난 2017년 시리아 내전에서 전략폭격기 공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전과가 뚜렷하다.

이번 전쟁에서도 러시아군 지휘봉을 잡은 지 이틀 만에 우크라이나 전역 12개 도시에 미사일 84발을 쏘는 등 대대적인 공습에 나섰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했을 뿐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게 러시아 내부 평가다.

특히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남부의 요충지 헤르손에서 퇴각을 결정하면서 러시아 내 강경 우파 진영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새해 들어선 한 건물에 수백 명의 징집병을 수용하는 군사적 실책으로 개전 이후 최대 인명 피해를 낸 탓에 비판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우크라이나 접경인 러시아 서부 로스토프에서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만나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우크라이나 접경인 러시아 서부 로스토프에서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만나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일각에선 수로비킨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한 러시아 군부 내 세력 다툼이 이번 경질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수로비킨이 '푸틴의 사냥개'로 통하는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과 너무 밀착한 탓에 강등 조처됐다는 풀이다.

프리고진은 최근 들어 러시아군의 무능을 강조하며 바그너그룹의 성과를 띄우는 데 바빴다. 그는 러시아군이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州)에서 "솔레다르를 바그너그룹이 점령했다"고도 10일 주장했다. 솔레다르는 격전지 바흐무트에서 북동쪽으로 불과 10㎞ 떨어져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난해 여름 이후 러시아가 주요 전장에서 거둔 첫 전과다.

그런 만큼  프리고진의 발언은 러시아 군부의 심기를 더욱 거북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프리고진과 친밀한 수로비킨을 경질해 간접적으로 경고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크렘린궁은 이날 솔레다르 점령과 관련해 "최근 낙하산 공수부대가 큰 역할을 해냈다"며 프리고진의 주장에 선을 그었다. 이와 관련, 러시아군 예비역 중장인 예브게니 부진스키는 "프리고진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라'고 보내는 신호"라며 "프리고진이 아무리 전장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더라도, 특별군사작전의 방향에 관해 결정할 수는 없다"고 블룸버그 통신에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회의 직후에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왼쪽),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21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회의 직후에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왼쪽),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번에 러시아군 총사령관을 겸직하게 된 게라시모프는 10년 이상 총참모장을 역임한 역전의 용사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푸틴 대통령은 게라시모프 투입으로 러시아군 지휘부의 전장 통제력을 강화하길 기대하고 있다. 이르면 이달 말 러시아군이 대규모 공격을 단행할 것이라 예측도 나온다.

서방의 진단은 다르다. 영국 국방부는 11일 트위터를 통해 "게라시모프의 등판은 러시아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방증"이라며 "러시아 뜻대로 전쟁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짚었다. 또 카린 장-피에르 미 백악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전쟁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게라시모프 개인에게도 이번 임명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마크 갈레오티 선임객원연구원은 "수로비킨에겐 암묵적 강등일 수 있지만, 게라시모프에겐 '독이 든 성배'일 수 있다"며 "푸틴은 또다시 비현실적인 희망을 품고 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11일에도 솔레다르에선 치열한 교전이 계속됐다. 프리고진은 이날 텔레그램을 통해 "솔레다르에서 우크라이나군 500명이 사망했다"며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우크라이나 부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솔레다르는 여전히 우리 땅"이라고 이같은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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