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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품처럼 멋진 진공관 앰프, 눈도 귀도 호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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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호 22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오디오 기기 ‘레트로그래프’

며칠 전 안동에서 강연 후 저녁엔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까지 봤다. 최근 지은 듯한 공연장은 깨끗했고 시설도 훌륭했다. 실감나는 무대장치와 조명의 디테일로 발레의 아름다움은 돋보였다. 하지만 반쪽이 빠진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은 녹음된 MR 반주로 대치됐다. 경비 절감이란 궁색한 이유가 전부다. 솔리스트 발레리나는 녹음된 음악 속도에 맞추느라 발레리노와 억지로 동작 속도를 조절하는 게 보였다.

프랑스 과자 ‘마카롱’을 연상시키는 핑크 버전. [사진 윤광준]

프랑스 과자 ‘마카롱’을 연상시키는 핑크 버전. [사진 윤광준]

음악을 듣거나 발레를 보거나 예술체험의 기회가 자주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 시간 속에 놓여있는 동안만이라도 우리는 아름다움에 몰입되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감정이다. 감정의 단계와 강도에 따라 수용의 폭이 달라진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행복은 우리말보다 영어로 바꾸면 더 쉽게 이해된다. 즐거움(Pleasure), 행복감(Happiness), 환희(Joy) 모두 우리가 바라는 행복들이다. 행복의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 셋은 개별적이거나 합쳐져 확장되기도 한다.

좋은 음악을 듣는 쾌감이 즐거움의 내용이다. 같은 음악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쾌감은 달라진다.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좋은 오디오를 통해 듣는 것보다 못하다. 아무리 좋은 오디오도 직접 공연장에 가서 듣는 것보단 못하다. 연주자의 호흡이 느껴지고 손의 현란한 움직임까지 보이는 음악이란 얼마나 생생한가. 공감각으로 다가오는 온몸의 반응은 음악적 흡인력을 극대화 시킨다. 음악의 외적 요소인 분위기까지 전달될 때 우리는 몰입의 순간을 맞는다. 음악에 몰입된 행복은 강렬하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충만함의 힘이다. 행복한 음악체험이 이어지면 지극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음악이 주는 행복의 선순환이어야만 그렇게도 원하는 환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와 닿는다.

감정의 절실함만큼 음악은 듣고 싶을 때 들어야 한다. 언제라도 실연의 감동이 충족된다면 축복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갈 수 없고 시간도 없다. 그래도 음악을 듣고 싶은 욕망은 줄지 않는다. 오디오 기기를 들여놓고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실연의 감동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은 음악과 일상을 같이 하는 즐거움이 위안이다. 멋진 소리가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위해 온갖 기행을 펼치면서 시간과 돈을 쏟아 붓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다.

강렬한 소리의 쾌감은 음악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러한 체험을 한 이들은 반복의 충동을 누르지 못한다. 궁극이라는 하이엔드 오디오까지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이유다.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좋은 오디오를 갖고 싶은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좋은 음으로 듣는 음악이 일상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온갖 음악이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간 시대여서 블루투스 장치를 곁들인 오디오 기기가 대세다. 쓸 만한 스피커만 갖추면 웬만한 소리가 나며 가격도 비싸지 않다. 하지만 음악을 듣다보면 그 웬만함이라는 게 불만족스럽게 바뀐다.

진공관 방식 앰프로 소리를 증폭하는 오디오 기기 ‘레트로그래프’. 한국 전통공예 나전칠기로 장식한 디자인. [사진 윤광준]

진공관 방식 앰프로 소리를 증폭하는 오디오 기기 ‘레트로그래프’. 한국 전통공예 나전칠기로 장식한 디자인. [사진 윤광준]

음악의 감동이란 외적인 요소까지 포함되어 다가오게 마련이다. 소리만 들려줘도 별 문제 없을 오디오 역시 존재감이 느껴져야 음악의 흡인력이 생긴다. 천편일률의 디자인과 실용을 전제로 만들어진 마무리의 미흡함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못 생긴 오디오는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곁에 두고 써야 하는 물건의 숙명이다.

최근 우리의 주거 상황을 보면 아파트 생활자가 대부분이다. 흰 벽과 격자로 분리된 내부 모습은 별 차이가 없다. 오디오 기기라면 이런 아파트 공간과 화합해야 한다. 일단 크기가 크면 부담스럽다. 주변 가구와 분위기를 해치는 시커먼 색깔뿐이라도 곤란하다. 원하는 색깔과 마감을 선택할 수 있는 주문형이라면 더욱 좋다. 모습만으로 눈길을 끄는 소리 나는 조각품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완성도 높은 마무리로 오랫동안 써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견고함도 원한다. 음악의 감동을 위한 좋은 소리는 당연하다.

이런 오디오 기기가 있을까? 있다. 그것도 모두의 상식을 깨는 진공관 방식의 앰프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진공관 앰프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첨단과 원시의 동거가 이루어진 셈이니까. 진공관의 매력은 첨단기술의 시대에 외려 돋보인다. 디지털의 차가움을 녹일 따뜻한 불빛과 날카롭지 않은 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진공관을 보지 못한 세대에겐 새로움이다. 전구처럼 생긴 유리관에서 소리가 난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는 건 당연하다.

음악을 일상에 끌어들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오디오 기기가 ‘레트로그래프’다. 실물을 처음 본 순간 놀랐다. 익숙하게 봐온 플라스틱 소재는 하나도 없었다. 얇은 철판으로 마감된 여느 앰프가 풍기는 허약함 대신 묵직하고 투터운 재질감이 느껴진다. 전면의 조절 노브도 독특하다. 프랑스 과자인 마카롱처럼 생겨 동그랗고 매끈하다. 각지지 않고 둥근 앰프와 어울리는 황동의 곡률과 광채는 보기만 해도 배부를 듯하다.

레트로그래프를 작업실에 두고 쓰고 있는 중이다. 멋진 앰프의 내부가 궁금해 열어보고 나서야 외관에서 풍기는 느낌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알게 됐다. 본체는 녹인 알루미늄을 틀에 넣어 굳힌 다이캐스팅으로 만들어졌다. 오랫동안 오디오를 봐왔지만 이렇게 만든 앰프는 본 적 없다. 이를 분사 도장법으로 여러 번 칠해 표면의 두터우면서 매끄러운 느낌이 만들어졌다. 앰프에서 풍기는 재질감의 고급스러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겠다. 좋은 소재를 쓰고 정성스레 마감하는 기본을 지켰을 뿐이다.

레트로그래프의 만듦새와 소리에 먼저 주목한 이들은 눈 밝은 외국의 명품사 관계자들이다. 자신의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원했고 한국의 문화와 문양을 넣은 디자인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통영의 자개를 박고 훈민정음에서 따온 한글의 자모를 찍은 버전이 만들어진 이유다. 레트로그래프는 앰프를 플랫폼으로 삼는다. 필요하면 무엇이든 결합시킬 준비를 갖췄다는 말이다. 앰프를 캔버스 삼아 색채와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좋은 음이 나오는 오디오 기기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토록 바라던 물건이 우리 곁에 있다. 〈끝〉

윤광준 사진가. 음악·미술·건축·디자인에 빠져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일상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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