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에 딱 2가지 배웠다 "술 먹기, 친구 먹기…인생은 그 2가지"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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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중 주연 오다기리 죠(가운데). [영화 공식 스틸컷]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중 주연 오다기리 죠(가운데). [영화 공식 스틸컷]

내가 나고 자란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니라면 어떨까요. 주어진 이름만으로 내 반 친구가, 선생님이, 은행 창구 직원이 “이 사람은 우리와 다르네”라고 알게 된다면요. 지난달 27일,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영화감독, 요이치 사이(崔洋一)가 그랬습니다. 이름의 한자를 보면 한국 사람 아닌가 하실 겁니다. ‘최양일’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던 자이니치(在日) 2세 영화감독입니다. 그의 일본어 이름은 ‘최양일’ 세 글자의 일본어식 발음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계 후손이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쓰며 사는데, 이름은 ‘덕천가강’을 고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949년생이니, 그가 한창 활동한 시기는 한국과 일본 간 근현대사의 생채기에 딱지는커녕 혈흔이 선연하던 때입니다. 웬만한 용기와 배짱, 어떤 차별이나 피해도 정체성을 위해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런 최양일 감독이 남긴 영화들은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밀도 있는 통찰로 가득합니다. 대표작 ‘피와 뼈’(2004)가 특히 그렇죠. 제주도에서 오사카(大板)로 건너간 김준평이라는 청년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배에서 사람들이 ‘오사카’의 한자 이름을 그대로 “대판이다, 대판!”이라고 외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최양일 또는 요이치 사이 감독. 2004년 내한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해 인터뷰 중입니다. [중앙포토]

최양일 또는 요이치 사이 감독. 2004년 내한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해 인터뷰 중입니다. [중앙포토]

영화 개봉과 함께 한국에서 찾아온 그를, 코리아 중앙데일리 신참 기자 시절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어로 기사를 쓰던 저는, 그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이니치 감독으로 한국식 이름을 쓰되 한국어를 공부하지 않은 배경을요. 하지만 제 질문은 아마도 통역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최양일 감독이 ”한국어를 왜 못 하냐는 질문을 듣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고, 누가 봐도 불쾌한 표정으로 답했거든요. 저는 한국어를 왜 못하냐는 타박을 하려던 게 아니었지만, 제가 일본어를 못한 탓과, 질문 요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저의 불찰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 후 저는 일본어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언젠가 최 감독을 일본어로 인터뷰하고 싶었습니다. 이젠 그럴 수 없습니다. 최 감독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피와 뼈'의 일본 포스터. [Wikipedia]

'피와 뼈'의 일본 포스터. [Wikipedia]

최 감독의 별세 소식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큰 조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영화 감독협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을 정도로 일본에서 거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에 앞서 이사장을 지낸 인물의 면면을 보면 더욱 그렇죠. ‘동경 이야기’ 등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감각의 제국’ 등으로 유명한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 등이 그의 선배 이사장들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조선’ 국적을 유지했으나, 여권 발급 및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한국으로 국적을 바꿨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기에, 여권 등 행정 절차가 꽤나 까다롭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을 오랜 기간 포기하지 않은 건 요이치 사이, 또는 최양일의 뚝심을 보여줍니다.

‘피와 뼈’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이자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예명 ‘비트 다케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동시대의 영화 동료로 언제나 함께 했던 최양일을 잃어버렸다. 맥이 탁 풀려버린다.” 그밖에도 그와 함께 작업했던 많은 배우들이 애도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혹시, 역시 한국의 DNA가 일본에도 통한 거라고, 통쾌하다고 느끼시는지요. 글쎄요. 최양일 감독은 본인을 한국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뿌리는 잊지 않고 그 주제에 천착했지만 말이죠.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한국에 꽤나 애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04년 당시 그의 영화를 상영한 코아아트홀의 임상백 대표는 2일 제게 “저녁 식사를 했는데 유쾌하게 웃으며 나를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셨던 게 기억난다”고 하뎌군요. 임 대표에게 ‘피와 뼈’의 장기 상영을 부탁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영화가, 자신의 뿌리의 본령인 한국에서 오래 상영되기를 바랐다는 뜻이겠죠.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영화]

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영화]

그는 2004년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한국인들은 타자(他者)를 받아들이는 데 아직 조금 서툰 것 같습니다. (중략)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왜 선글라스를 쓰고 있냐고 어떤 분이 호통을 치더군요.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도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느냐’고 반문하긴 했지만, 씁쓸했어요. (중략) 백수로 놀고먹던 시절도 길었지만 항상 저 자신에 대해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자이니치들이라고 정체성에 대해 밤낮 24시간 내내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잊을 순 없죠. 전 그걸 영화로 담아냈을 뿐입니다.”

보너스 이야기 한 조각. 최 감독의 스승은 오오시마 나기사였습니다. 그에 대해 2004년 물었을 때 최 감독은 이렇게 장난스런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었죠. “오오시마 감독에게 배운 건 딱 두 가지에요. 술 마시는 법과, 친구 사귀는 법. 그런데 말이죠, 결국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 두 가지 아니겠어요?”

최양일이자 요이치 사이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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