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괴로움을 최대한 건조하게 쓴다" 에르노가 지금 한국을 쓰면?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뉴스 ONESHOT’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 매일 일기를 쓰는 그가 한 가지 안 쓴 게 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으시다 보면 답이 나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 매일 일기를 쓰는 그가 한 가지 안 쓴 게 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으시다 보면 답이 나옵니다. 로이터=연합뉴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가 쓴 『부끄러움』의 첫 문장입니다. 소설가라서 역시 상상력이 풍부하다고요? 아닙니다. 에르노가 뛰어난 작가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만을 씁니다. 위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에르노가 뉴요커 최신호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1952년, 에르노가 11살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관찰력과 타협하지 않는 정직한 문체로 유명한 에르노라고 해도, 위의 경험을 소화해서 책으로 낸 건 1997년. 45년이 걸렸습니다. 굳이 끔찍한 기억을 소설로 담아낸 이유는 뭘까요. 에르노는 이처럼 자신의 끔찍하거나 부끄럽거나 행복했거나 슬펐던 경험을 다양하게 작품으로 치환시킵니다. 그런 그의 스타일은 떄로 문학계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시간은 에르노의 편이었죠. 노벨상 위원회는 에르노에 대해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가진 작가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런 에르노에게 중요한 루틴이 있으니, 일기를 쓰는 거라고 합니다.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그러나 에르노는 뉴요커에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던 내용은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에르노는 ”노벨상을 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하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스웨덴 국가번호가 핸드폰에 뜨더군요. ‘이건 무슨 나쁜 농담 같은 걸거야’라고 생각하고 안 받았어요. 그런데 라디오를 틀고 부엌으로 가는데 제 이름이 들려오더군요. 막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는 완벽하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문학동네

에르노는 뉴요커에 자신의 집필 스타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평평한 글쓰기(l’écriture plate).” 수식어나 비유 등은 철저히 배제하고 건조하게 팩트를 엮어냅니다. 에르노는 뉴요커에 “언어라는 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며 “내가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것은 단순히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정치성을 배제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괴로움을 겪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건조하게 써서, 그들의 삶을 감성적으로 꾸미거나 과대포장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으로 승부하겠다는 뚝심이, 에르노에겐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의 일화들(『부끄러움』『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부터 본인의 이혼(『얼어붙은 여자』), 유부남과의 불륜(『단순한 열정』) 등을 소설로 쓰는 것이겠죠.

그렇다고 모든 일기가 작품일 수는 없죠. 노벨문학상이 그에게 주어진 것은 개인의 꾸밈없는 삶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사건사고들에서 인류의 보편성을 끌어내고 관찰하며 때론 반추할 수 있도록 확장시키는 힘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나는 그저 기록하는 사람일뿐”이라고 덤덤히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에르노. 사진 문학동네

아니 에르노. 사진 문학동네

수많은 사건사고를 남긴 2022년도 이제 약 6주 남았습니다. 에르노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요. 자못 궁금해지는 11월입니다. 거친 수식어나 격한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벌어진 일을 날카롭게 직시하고 소화하고 성장하며, 서로에게 조금은 따스해지는 2023년을 조심스레 꿈꿔봅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