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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 그 자체인 드로잉, 전시장으로 들어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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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아르코미술관 '디자인 에너지'-이순주 '한입'.

요즘 미술계에 드로잉 바람이 거세다. 변방 장르로 저평가됐던 드로잉이 전시의 주체로 전면에 나서고, 드로잉 전용 전시장에 전문 자료실을 갖춘 드로잉센터도 생겨났다. 작품의 과정을 중요시하는 현대 미술의 흐름 때문일까, 작가들도 드로잉을 '예열 작업'이 아닌 창작의 첫 단추로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단순한 그림을 탈피해 설치.공간디자인.애니메이션으로 확장하고 있는 드로잉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시 두편이 여기 있다.

#드로잉은 과정이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의 '드로잉 에너지'전의 첫인상은 "이게 드로잉이야?"라는 물음표로 시작된다. 흔히 드로잉을 종이에 펜으로 그린 선화를 연상한다면 더욱 그렇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그물, 농사기구의 분해도 등 입체적 작품들이 나왔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형미 큐레이터는 "표현 기법을 보지 말고, 작가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를 보라"고 말한다. 작가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끄집어내는(draw) 행위가 바로 드로잉이라는 것이다.

평소 옥상에서 텃밭 가꾸기를 하는 배종헌은 그의 작품 '콘크리트 농부'에서 농작물의 성장과정과 자체 개발한 농사기구를 드로잉으로 선보인다. 총각무를 거꾸로 세워놓은 그림에 '번개를 기다리는 사나이'라고 이름짓는 등 기발함이 엿보인다.

자연과 함께 작업해 온 임동식의 드로잉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그림을 그린 후 지우개로 지우고 그 찌꺼기로 다시 그 형상을 만드는 등 작업으로 돌고도는 자연의 생리를 발견한다. 스스로를 e-bay 중독자라 칭하는 이미혜는 인터넷 경매에서 사지 못한 물건들을 드로잉으로 그려 대리만족을 얻는다고 한다.

참여작가 10명의 작업을 들여다 보면 예술을 한다기보다는 즐기고 있다는, 정말 과정 속에 작가들이 숨쉬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12월 4일까지. 02-760-4598.

#드로잉은 '날 것'이다

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은 17일 전시장 1층을 드로잉센터로 전환하고, 개관 기념전으로 '잘긋기'전을 열고 있다. 드로잉에 일가견이 있는 40여 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상상력이 참 기발하다.

드로잉을 펜으로만 그리랴, 배영환은 알약을 다닥다닥 붙여 글자를 남겼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이라는 대중가요로.

오인환은 거리를 캔버스 삼아 쌀을 뿌리거나 버려진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메시지를 전달한다.

드로잉센터의 설원기 디렉터는 "어떤 훌륭한 작품도 작가의 거칠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다"며 "드로잉은 작가의 최초 생각의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작 중엔 드로잉이라고 보기엔 정말 힘든 설치물이 보이는데, 작가가 작업할 때 부담없이 들춰낸 아이디어나 상상력을 좇아가면 전시를 감상하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드로잉센터는 매년 작가 공모를 통해 기획전을 열고, 공모작을 포함해 국내 유명작가의 드로잉도 소장할 계획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1일까지. 02-410-1061.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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