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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계의 새 물결] 9. 인터넷·정보화시대에 관한 성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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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근 인터넷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인터넷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진 만큼 이 분야에 대한 연구의 질도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사회과학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적 개입을 포기하는 순간 더 이상 비판적 학문으로 기능을 잃게 된다.

디지털 존재에 대한 분석과 개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인터넷이 대중화의 시동을 걸 당시에는 기 술유토피아주의 낙관적 열광에 바탕을 둔 정보 고속도로나 인터넷 확산에 관한 각종 정책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1995년 출간된 네그로폰테의 '빙 디지털(Being Digital)'이라는 저서는 디지털화하는 사회에 디지털로 참여하기를 권고하던 달콤한 초대장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지니고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갔다. 불과 5년도 안 되어 인터넷 없이는 못 살 정도로 사회와 경제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졌다.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미국 '디지라티'(사이버 정보화시대의 신흥 엘리트를 통칭)에게 중요한 것은 '디지털 빙'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가 아니라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것(빙 디지털.디지털 되기)이었다. 미국은 디지털 존재를 만들고 확산하면서 전세계의 지배권을 확장하는 디지털 제국으로 우뚝 서기에 이르렀다.

이런 정보 제국주의적 흐름에 대해서는 일찍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디지털 경주의 선두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기술 유토피아주의자들에게 디지털이란 존재와 그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삶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철학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묻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와중에서 정보사회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적 분석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네그리의 저서 '엠파이어(empire)'는 디지털 혁명을 앞세운 미국 자본주의의 흐름을 '제국'의 형성이란 차원에서 파헤친 대표적인 비판서이다.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에 관한 3부작은 정보사회에 관한 사회과학적 연구의 전범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이데올로기라도 그런 이데올로기를 낳은 사회적 조건이 사그라지면 여지없이 파탄을 맞게 된다. 현실은 어떤 학술적 비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 해독제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 신경제의 허실이 드러나자 거품처럼 끓어오르던 '새로움'과 '대박'의 인터넷 이데올로기들은 순식간에 꺼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이 디지털 세상의 모양을 꼼곰하게 되짚어 보는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디지털이란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문학적인 인식과 디지털 세상에 대한 반성은 디지털 존재의 확산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다. 이미 인터넷은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하였고 디지털 존재는 도처에서 우리와 조우한다. 이제 '디지털 만들기'만큼이나 '디지털과 만나기'가 중요해진다.

디지털 존재는 0과 1의 기호로, 디지털 이미지로, 온라인 시장으로, 채팅으로, 패러디로, 신경제로, 온갖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며 우리 사회에 출현한다. 디지털은 우리 사회 내부에서 실존하는 것이다. 디지털 사물은 외화된 지식노동의 산물인 동시에 하나의 객관화된 사물이고 인간에 대립되는 하나의 존재 자체로 현존한다.

맥루헌의 전통을 이어받는 미국의 '미디어 생태학 모임'(Media Ecology Association)은 인공물이 인간의 지각체험과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확산하고 있다. 인간과 인공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추세를 보면 마르크스의 '소외론' 전통을 이어받는 경향과 맥루헌의 '인간 능력 확장론'을 지지하는 입장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인간과 디지털 사물의 관계 및 디지털 존재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주요한 연구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디지털 존재는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디지털 존재는 다른 인공물과 다름없다. 그래서 디지털과 인간, 지식과 인간 간의 관계가 특히 실천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주목받게 된다. 레비의 '집단지성'론이나 프랑스 에베르-쉬프랭의 '지식상호 교환 네트워크 운동(MRERS)', 그리고 미국의 레식 교수가 전개하는 '디지털 공유(digital commons)'운동은 디지털 시대의 지식과 만나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 모색이자 실천이다.

50여년 전에 포퍼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란 저서에서 전체주의적인 사고와 사회체제를 비판한 바 있다. '지식 기반사회' 혹은 '정보사회'로 불리는 현대 사회에도 지식의 공유를 가로막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 존재한다. 제국과 거대자본, 디지털 독점체들이 그것이다. 인터넷은 닫힌 지식을 열린 지식으로 만들기에 아주 적합한 토양을 마련해 주었지만 디지털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의 끝없는 확장은 디지털 지식과 인간의 만남을 제한한다.

디지털 세상에 침투한 지적 재산권 관련 법률은 열린 소스와 열린 생각을 보장하던 인터넷의 자유로움에 커다란 장애물로 대두하고 있다. '코드'라는 책에서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규제 방식을 분석하여 유명해 진 레식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아이디어의 미래'에서 디지털 세상에서의 공유물이 처한 운명을 분석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적 공유물(intellectual commons)'이 빈약한 곳은 공원도 없고 모든 산야가 온통 사유지의 '접근불가'라는 팻말로 봉쇄된 삭막한 나라와 같다. 게걸스러운 탐욕에 물든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과연 창의적인 지식이 만들어질까? 초고속망을 타고 달리는 정보와 지식이 온통 장사꾼의 손때가 묻은 것일 때 더 이상 우리에게 참다운 지식은 없다.

백욱인 서울산업대 사회학 교수

◇약력=▶서울대 사회학과 석.박사▶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사회학)▶네트워크 사회의 변화와 활용방법에 대해 연구▶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를 번역하였고, 저서로는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와 네트문명 비평지 '구운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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