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뜨고 싶다" 탤런트 선발대회 '끼 경연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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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김미진입니다. 전 청주에서 어제 올라왔어요. 잠잘 데가 마땅치 않아 그냥 찜질방에서 잤는데 얼굴이 이렇게 부었네요. 목소리도 잠겼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사극 연기 한번 해보십시오."


애잔하게 눈을 감기도 하고, 한 곡조 시원하게 부르기도 한다. 다채로운 표정만큼 스타를 향한 그들의 끼가 넘쳐났다.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 그러나 치마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응시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생긋생긋 웃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권상궁이나 설향이가 그 혹독한 문초에 시달리면서도…." 처연한 목소리에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은 프로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아쉬움에 눈물도=지난달 30일 경기도 수원 KBS 드라마센터. 미래의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끼를 정성을 다해 발휘하고 있었다. 바로 KBS 공채 연기자 선발 2차 실기 테스트가 실시된 것.

5천여명에 달하는 지원자중에 1차 서류전형을 거쳐 2차 시험에 오른 이들은 모두 4백80여명. 나흘에 걸쳐 진행된 2차 실기 테스트 중 이날은 여성 지원자들의 연기력을 심사하는 날이었다. 평가 항목은 정해진 사극 한 대목과 현대극 대사 세가지 중 하나를 골라 연기하는 것. 그밖에 마임이나 춤.노래 등 빼어난 장기를 보이면 가산점이 붙었다.

늦가을 쌀쌀한 아침 바람을 뚫고 시험장에 모인 여성들은 마치 수험생마냥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기실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면서 눈을 감은 채 시험 대사를 외우느라 바빴고, 속이 바짝바짝 타는 듯 쉴새없이 입을 움직였다. 여고 2학년인 김현진양은 "너무 떨려 대사를 몽땅 까먹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떨어져도 계속 도전=지원자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연극영화과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었다. 그러나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뒤늦게 이 길로 뛰어든 늦깎이 지망생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대구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했다는 김은경(26)씨는 "3년 전 다니던 병원을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연기 학원에도 다니고 단역이나 CF 모델로 방송에 몇차례 얼굴을 내민 적도 있다. 이번에 떨어져도 연기자의 길에 계속 도전할 것"이라며 비장감마저 보였다.

실기 시험장의 풍경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6명의 심사위원들은 냉랭하다 싶을 만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차마 말을 붙이기도 어려운 분위기였지만 예비 스타를 희망하는 응시자들은 조금이나마 강한 인상을 심고자 아득바득 애를 썼다.

◇척 보면 안다=평가 점수 배분은 용모 50점, 표현력 30점, 발전가능성 20점 등 세부분으로 나뉜다. 심사위원인 드라마 '첫사랑'의 연출자 이응진 CP는 "이 바닥에서 지낸 지 20년도 넘지 않았는가. 들어와서 10초만 지나면 합격될지 떨어질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한 지원자의 실기가 끝난 뒤 심사위원 6명이 노트북으로 입력시키는 점수를 슬쩍 엿보니 모두들 비슷한 점수를 매겼다. KBS는 이번 선발 과정에 모두 60명의 현업 PD를 투입했고, 평가 과정마다 한번 입력시킨 점수는 다시 고칠 수 없게끔 해 최대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기하도록 했다.

지상파 3사는 한동안 중단했던 신인 탤런트 선발 대회를 공교롭게도 올해 모두 재개했다. SBS가 이미 지난달 최종 합격자 6명을 발표한 데 이어 KBS는 6년 만에, MBC는 2년 만에 공개 채용 방식을 부활시켜 현재 진행중이다.

◇경쟁률 5백대 1=2차 테스트를 통과해도 3차 카메라 테스트, 4차 최종 종합평가 등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예상되는 최종 합격자는 10여명. 무려 5백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신인 탤런트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탤런트가 됐다고 단숨에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날 진행을 도운 탤런트 정의갑(무인시대 출연 중)씨는 "95년 공채로 뽑혔지만 주목을 받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스타는 정말 극소수다. 그저 직업을 연기로 삼겠다고 생각하고 임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최민우,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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