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스캔들'은 싱겁게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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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10월 23일 한국은행은 국회 재경위원회 의원들로부터 국정감사를 받고 있었다. 사사건건 싸우기만 하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날 마치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를 몰아붙였다.

“한은이 금리 올려 경기 죽였다”

이코노미스트여야 의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나쁜데, 한국은행이 부동산을 잡겠다고 콜금리를 다섯 번이나 올리다니 경기를 아예 죽일 셈이냐”고 쏘아붙였다. “금리를 내려도 시원치 않을 판”이라는 의원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행은 경기부진의 원흉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성태 한은 총재가 반격(?)을 시도한 것은 3일 후인 26일 밤 부산대 강연을 통해서다.

“(올해 경제가) 5% 성장을 한다고 해도 이런 불경기는 없다고 한다. (중략) 주먹구구식 논리로 해도 성장률이 4~5%, 물가가 2~3%이면 콜금리 4.5%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너무 높으니 내려주시오 한다.”

콜금리를 내려 정부의 경기부양책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셈이다.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나설 생각 말고 양극화 문제 등 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 구조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게 이 총재의 요구였다.

당정과 한은이 경기부양론을 두고 샅바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이 총재가 10월 23일 국정감사장에서 뭇매를 맞고 있던 그 시간,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의 ‘분당급 신도시’ 개발 계획이 발표됐다.

이는 이후 전국을 뜨겁게 달군 부동산 광풍의 신호탄이 됐다. 집값을 잡겠다고 내놓은 대책이 오히려 투기심리에 불을 지른 셈이었다. 정부가 내놓은 그간의 부동산 대책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했고, 동시에 한국은행에 또 한번의 홍역이 엄습하고 있다는 전조였다.

금통위를 3일 앞둔 문제의 11월 6일. 모든 사단이 이날 벌어졌다. 정책홍보를 위해 정부가 운영 중인 ‘국정브리핑’은 집값 안정을 위해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는 칼럼을 홈페이지 톱뉴스로 올렸다.

저금리로 인해 풀린 돈이 부동산 투자 열풍을 유발했고, 은행 빚을 내 부동산에 투자한 뒤 이자를 갚느라 소비가 부진하고, 이로 인해 불경기가 이어져 금리를 올리지 못하니 또다시 저금리가 유동성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칼럼은 “콜금리 인상이 청와대의 뜻”이란 해석을 낳으면서 곧바로 11월 금통위에서 콜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부동산발 금리 인상론’으로 이어졌다. 불과 보름 전 금리를 올려 경기침체를 유발했다는 화살을 맞고 비틀거렸던 한국은행은 이번에는 금리를 너무 낮춘 바람에 나라를 망할 위기에 몰아넣은 역적이 되고 있었다.

“저금리가 부동산 거품 불렀다”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 비서관이 한국은행을 방문한 것은 6일 오후. 오다가다 한두 명의 기자와 마주쳐 인사까지 나누었을 정도로 비밀회동도 아니었고, 한은 역시 보안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채권시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날 국정브리핑 뉴스가 나온 이후 금리가 급등하는 약세장을 경험한 후 숨 돌리기를 하던 때였다. 청와대 비서관 한 사람이 그날 아침 이성태 총재를 만났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루머는 점점 구체화돼 금리 인상과 주택담보대출 총액규제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청와대의 뜻을 전달했다는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 총재를 만난 사람이 8·31 부동산대책의 주역, 김수현 비서관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청와대의 금리 인상 압력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한국은행이 아무리 독립성이 높아졌기로서니, 청와대 뜻까지 거역하겠느냐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9일 금통위가 열렸다. 기자실은 그 어느 때보다 북적대고 부산스러웠다. 올 들어 한국은행에 최고의 관심이 쏠린 날임을 대변하는 듯했다. 현장 분위기를 궁금해하는 전화를 받느라 기자들도 정신이 없었다. 다들 초긴장 상태였다. 콜금리 인상 결정에 대비해 미리 기사를 만들고 있는 기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금통위는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회의장에 있던 장세근 공보실장이 공보실에서 대기 중이던 김한중 차장에게 전화를 건 시간은 10시2분. 금통위 시작 후 정확히 1시간 만이었다. 콜금리는 ‘동결’이었다. 이날 금통위 회의장에 9시 정각 도착한 이성태 총재는 “역시 오늘 카메라가 많군요”라고 인사말을 꺼냈다.

그 다음 말이 의미심장했다. “(회의장에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길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진다’는 문구를 봤다. 최근 보도를 보면 역시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언론의 추측성 보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김수현 비서관을 만난 배경을 묻자 이 총재는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도 아니다. 방문한다고 해서 만나자고 했고, 한 얘기도 밖에서 상상하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고 했다. 또 “추측하고 언론 타고 하는 것이 생각 밖이다.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이 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추측 보도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 총재의 스타일로 보건대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된다’는 타입으로 주위 눈치를 잘 보지 않는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언론 타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특히 금리정책에 대한 외압과 관련해서는 한국은행 독립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기본 중의 기본으로 깔고 가는 성향이 강하다.

직장생활이라고는 오로지 한국은행이 전부로, 별다른 배경 없이 능력 하나로 총재에 올랐다는 평을 듣는다. 대통령의 고등학교 3년 선배라는 후광을 등에 업었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인연을 갖고 있지도 않다고 한다. 인간관계가 그리 폭넓은 편도 아니라고 한다.

후문에 따르면 이 총재와 김 비서관은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김 비서관이 말한 시간을 다 합해도 10분 정도. 나머지 50분은 이 총재의 말을 듣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 신변잡기에 대한 얘기나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김 비서관이 청와대의 뜻을 전하는 자리는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차라리 배움을 받는 자리라면 모를까.

흥미로운 것은 일부 언론의 반응이었다. 금통위 직전 “청와대의 뜻에 따라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릴 것이다”는 투로 기사를 쓰던 언론들은 정작 콜금리가 동결되자, 이 총재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막판에 인상카드를 접었다고 썼다.

이들 언론이 내보낸 일련의 기사를 읽자면 마치 드라마틱한 소설 한편을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물론 대목과 대목에는 한은의 ‘관계자’ 또는 ‘고위 관계자’ 코멘트가 인용돼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추측 보도가 금리 인상설 키워

지난 3년 내리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국은행에 죽치고 있는 기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7명의 금통위원이 치열한 토론 끝에 결정하는 콜금리를 “총재께서 막판에 접으셨다”고 할 만한 관계자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는 참으로 많은 관계자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콜금리 동결이 결정되고, 한국은행의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은행 집행부의 의견이 무엇이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그거야 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물어요. (금통위 회의가) 한 시간밖에 안 걸렸잖아요. 그걸 참고하시면 되겠네”였다.

강종구 기자
[darksky@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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