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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이대준 주무관 월북 논란을 끝내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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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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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발생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감사원이 문재인 전 대통령 서면조사를 시도하면서 정쟁이 가열된다. “무례한 짓”이라는 문 전 대통령의 발언엔 자신이 임명한 최재해 감사원장에 대한 분노도 담겼을 것이다. 감사원이 서면조사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일단락됐지만, 국정감사 시즌에, 검찰이 수사하는 와중에, 다른 관련자 조사도 미진한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 조사가 적절한 타이밍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2년이 넘었음을 고려하면 진상 규명이 시급한 건 분명하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긴 했다. 이대준 해양수산부 주무관이 자진 월북했다는 지난 정부 발표엔 충분한 근거가 없다. 시간이 흘러도 스모킹 건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북한군에 피살된 직후 어떤 과정을 통해 그는 '월북자'가 됐을까. 열쇠는 당시 문 대통령에게 올라간 보고서에 담겼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참모진이 출간한 『대통령 보고서』를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연설기획비서관이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이 집필한 이 책엔 긴급한 사건ㆍ사고가 발생했을 때 청와대 보고서를 작성하는 원칙이 들어있다.

만행 직후 청와대 생각 밝힐 단서

노무현 정부 『대통령 보고서』 담겨

‘상황ㆍ정보보고서가 다른 보고서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신속ㆍ정확ㆍ간결성을 중시한다는 것’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22일 밤 9시 40분쯤 이 주무관이 살해됐는데 대통령 보고는 23일 오전 8시 30분에야 이뤄졌다는 발표는 이 책이 제시한 보고 지침과 어긋난다.

보고서 제목의 모범 사례로 ‘경기도 연천 아군 GP에서 총기 사망사고 발생’을 예시했으니, 대통령에게 올라간 첫 보고서는 ‘북한 등산곶 인근 해상에서 해수부 공무원 북한군에 피격 사망’ 정도가 될 듯하다.

이 상황보고서에서 가장 주목할 대목은 문서의 ‘결론’이다. 여기엔 ▶평가 ▶대책 및 대응방안 ▶조치의견 ▶고려사항이 담긴다. 이 주무관이 피살된 직후 이 항목이 어떻게 작성됐는지가 관건이다. 보고 이후 정부의 발표와 대응이 이 내용대로 이뤄졌는지를 따라가면 사태의 성격이 드러나게 된다.

진실 규명을 누구보다 갈망해온 건 이 주무관 가족이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도 월북자 가족이라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북한군에 사살된 후 불태워진 이 주무관은 월북자라는 낙인 때문에 이름조차 내놓지 못했다. ‘해수부 공무원’으로 불렸다. 2008년 북한 총격으로 숨진 박왕자씨가 많은 사람의 애도를 받은 선례와 대조적이다.

〈YONHAP PHOTO-3909〉 해수부장으로 엄수되는 '북한 피살 공무원' 영결식   (목포=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고(故) 이대준 주무관의 영결식이 22일 오전 전남 목포 한 장례식장에서 해양수산부장(葬)으로 엄수되고 있다. 2022.9.22   hs@yna.co.kr/2022-09-22 10:11:08/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YONHAP PHOTO-3909〉 해수부장으로 엄수되는 '북한 피살 공무원' 영결식 (목포=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고(故) 이대준 주무관의 영결식이 22일 오전 전남 목포 한 장례식장에서 해양수산부장(葬)으로 엄수되고 있다. 2022.9.22 hs@yna.co.kr/2022-09-22 10:11:08/ 〈저작권자 ⓒ 1980-2022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부인 권영미씨는 생계를 꾸리면서 남편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겹게 싸워야 했다. 지난 정부 내내 가슴을 후벼 파는 고위층의 말에 상처가 덧났다. 이 주무관 가족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비난에 시달린다. 지난 5월 몇 차례 보도된 적 있는 아들의 장래 희망을 언급하자 "그 얘기는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비아냥대는 댓글이 많이 달린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은 지난 5월까지 아빠의 죽음을 몰랐다. ‘월북하려다 사살됐다’는 정부 발표를 차마 알리지 못해 "뉴질랜드에 일하러 갔다"고 둘러댔다. 딸이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할 때마다 괴로웠다. 1년 8개월을 버티다 "아빠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딸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정부는 왜 확실한 근거도 없이 도박 빚 때문에 월북했다고 단정했을까. 권 씨는 "남편이 스스로 초래한 일이라고 얘기하려는 속셈"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런 주장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당시 페이스북에 "월북은 반국가 중대범죄"라며 "계속 감행할 경우 사살하기도 한다"고 적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9월에 40대 민간인이 월북하려다 우리 군에 의해 사살당한 사례가 있었다"며 "월경해 우리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면 달리 손 쓸 방도가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국제적인 상식"이라고 했다.

사태 책임자들 유가족에 사과해야

도박 빚을 강조할수록 이 주무관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커진다. ‘공무원이 도박으로 큰 빚을 진 뒤 갚지 않고 북한으로 넘어가려다가 사살당했다.’ 정부 발표로 구성된 스토리는 이 주무관을 손가락질한다.

천인공노할 만행 직후 문 전 대통령은 북한과의 교류를 재차 강조했다. 여론조사 지지율도 올랐다. 그러나 이 주무관의 가족에겐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시작됐다. 지난달 22일 이 주무관 영결식이 열렸다. 피살된 지 2년 만이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로 정쟁은 오래갈 태세다. 잊을 만하면 문 전 대통령이 거명되고 "무례하다"는 호통이 들릴 낌새다. 이슈를 끌어봐야 좋을 리 없는 지난 정부 책임자들이 이 주무관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야 한다. 그게 사태 종결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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