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그리고 두 명만 살아남았다…돈 안 되는 환자들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103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저서 『인생문답』에서 평생 벗이었던 안병욱(2013년 사망ㆍ향년 93세)ㆍ김태길(2009년 사망ㆍ향년 89세) 박사와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인지를 두고 논의한 일화를 소개했다. 세 사람이 내린 결론은 60세부터 75세까지다. 60살은 돼야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남녀 모두 80세를 넘어섰으니 대다수가 황금기를 만끽할 기회를 누린다.

희귀암 치료법 불허로 계속 사망

하지만 단 하루도 나답게 살아 보지 못할 운명 앞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희귀암 환자다. 환갑은 꿈 같은 얘기일 뿐 그저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곁에서 돕게 해달라고 빈다. 1년 전 중앙일보 기사(2021년 9월 7일자 25면)로 소개한 신경내분비종양 환자 황원재(36)씨가 그런 사람이다. 경북 구미에서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아들 시온(4)이의 대학 진학을 보는 게 간절한 소망이다. 그의 여권엔 독일과 말레이시아 입출국 도장이 빼곡하다. 6년 전 “남은 시간이 3~6개월뿐”이라는, 앞이 캄캄해지는 진단을 받은 이후 항암 치료를 위해 외국 병원을 드나든 기록이다.

죽음 문턱에 서도 독일 병원 가야 

황씨가 말레이시아 등지를 다니며 받은 항암 치료는 국내 의학 기술로 어렵지 않다고 학계에선 말한다. 해당 치료제가 정부 규제에 막혔을 뿐이다. 독일에서 시행하는 ‘악티늄’ 치료를 받기 위해 위중한 환자들이 코로나19 속 장거리 비행을 감수하는 사실이 보도되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직접 독일을 방문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의 1년 전 모습(왼쪽)과 지난 2일의 모습(오른쪽). 1년 사이 항암 치료를 받느라 탈모가 심해졌고, 아들 시온이는 많이 자랐다. 강주안 기자

희귀암 환자 황원재씨(가운데)의 1년 전 모습(왼쪽)과 지난 2일의 모습(오른쪽). 1년 사이 항암 치료를 받느라 탈모가 심해졌고, 아들 시온이는 많이 자랐다. 강주안 기자

그 후 1년 동안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지난 2일 오후 경북 구미의 황씨 집을 찾아갔다. 정부가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황씨에게 별로 나아진 건 없었다. 여전히 악티늄 치료는 한국에서 허용이 안 된다. 식약처 관계자는 "우리가 전문가 및 국회와 얘기하는 노력까지 했지만, 현행 제도 상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추진하자는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그 사이 황씨는 치료를 받으려 독일에 세 번 갔다. "원래 2개월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비용 때문에 절반만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72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황씨는 "악티늄 치료 경과가 좋아서 다행"이라며 컨디션이 좋다고 했다. 그의 모습을 1년 전 취재 때 찍은 사진과 비교해봤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생긴 탈모가 눈에 띈다. 시온이는 1년 새 부쩍 컸다. 머지않아 취학을 하면 사교육비가 들 거다. 황씨가 받는 급여는 독일 치료비를 대기도 버겁다.

해외에서 개발한 희귀암 치료제 도입이 난항인 까닭을 전문가들은 "희귀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행 의약품 허가 시스템은 제약회사가 나서야 작동이 쉬운 구조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되지 않는 환자는 관심 밖이다. 그 많은 제약회사 중 어느 곳도 희귀한 그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식약처에선 "국회에서 법안을 만드는 방안도 있긴 하다"고 알려준다. 표를 세는 게 일상인 정치인에게 희귀암 환자는 몇 표로 보일까.

"국내 도입 애쓴 7명 중 5명 별세" 

겹겹의 난관을 뚫고 한국원자력의학원 임일한 박사팀이 동물 실험 등의 절차를 거쳐 이달 초 악티늄 임상 승인을 신청했다. 국내 도입의 첫걸음이다. 이 절차가 진행되는 사이에도 희귀암 환자의 부고가 잇따랐다. 독일 행을 모색하던 이모ㆍ안모씨가 세상을 떠났다. 6년 전 환우회를 만들어 치료제 도입을 주장한 7명이 있다. 황씨도 그중 하나다. 노력의 결실로 일부 의약품이 들어왔다. 문제는 희귀암 투병엔 계속 새로운 치료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새 치료법이 나올 때마다 국내 승인에 오랜 시일이 걸린다. 형편이 나은 사람은 독일ㆍ인도 등지를 찾아가 치료를 받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는 국내 허가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7명의 초기 임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황씨를 포함해 2명뿐이다. 악티늄 승인을 기다린 지난 1년 사이에도 임원 2명이 생을 마감했다.

임일한 박사팀 악티늄 임상 승인 신청 

언제까지 이럴 거냐는 한탄이 의학계에서 나온다. 의료 선진국에서 치료를 시행 중이고, 공신력 있는 논문까지 나왔다면 말기암 환자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건욱 서울대병원 핵의학과 교수는 "이런 의약품을 들여와 동일성 검증만 거쳐 치료에 들어간다면 한 달 이내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운명은 아무런 이유 없이 몇몇 사람에게 희귀암이라는 고통을 안겼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선 의학과 과학이 힘을 합쳐 희귀암 환자들이 운명에 맞서 싸우는 걸 돕는다. 우리도 그 대열에 동참했으면 한다. 황씨 같은 사람이 해외에 가지 않고도 희귀암을 이겨내고 ‘나답게 살 수 있는 날’을 만나게 해준다면 정부든, 국회든 그보다 뿌듯한 일이 있을까.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