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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주안의 시선

'허경영 세대'의 비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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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거리에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의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있다. 임현동 기자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달 25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거리에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의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있다. 임현동 기자

 ‘Z세대’는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 직전의 ‘밀레니얼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들었다면, Z세대는 디지털로 세상을 만나왔다. 이들을 정치적으로는 ‘허경영 세대’라 부를 만하다. 이들이 초등학교ㆍ중학교에 다니던 2007년 대선에 허경영 후보가 출마했다. 투표권이 없어 정치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던 아이들에게 공중부양과 축지법에 능하다는 후보는 신기했다. 그의 로고송을 따라부르는 아이들에게 선거는 놀이로 다가왔다.

정치권 무능과 허풍 공약 속 #실업급여에 의존하는 Z세대 #창의력 빛나게 할 시장 뽑아야

허 후보는 Z세대의 부모인 ‘86세대’와의 가교 역할도 했다. 부모 세대가 학창시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새마을 노래’(작사ㆍ작곡 박정희) 가락이 아이들 목소리로 재생됐다. 가사는 ‘출산하면 3000만원’으로 바뀌었지만, 아날로그 부모와 디지털 자녀 사이에 모처럼 공감이 생겼다. 허 후보의 전화번호는 학생들 사이에 공유됐고 개구쟁이들은 실제로 번호를 눌렀다. 한 중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허 후보에게 “공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허경영을 세 번 부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예습ㆍ복습을 철저히 하라는 둥 식상한 해법과 완전히 차별화한 그의 처방은 정치인도 사람을 웃게 한다는 체험을 제공했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허경영 후보 통화 관련 글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허경영 후보 통화 관련 글

Z세대는 개그로 알았던 그의 공약이 정책으로 나타나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경북 문경시를 비롯해 출산장려금 3000만원을 주는 지자체가 속속 등장했다. 4ㆍ7 보궐선거는 그의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서울에선 허 후보가 소심해 보일 정도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소상공인 5000만원 무이자 화끈 대출”을 약속했다.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는 “자영업자 무보증ㆍ무이자ㆍ무담보ㆍ무서류 1억원까지”를 외친다. 영화 ‘타짜’ 버전으로 “5000 받고, 5000 더”인 셈이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공보 문구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공보 문구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선거공보 문구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 선거공보 문구

선거가 끝나도 마찬가지다. 정치권 전반에 “IQ가 430”이라는 ‘허경영식 허풍’이 대세가 됐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7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1차 호프 미팅’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구본준 LG 고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있는 자리에서 “부동산 가격을 잡으면 피자를 한판씩 쏘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다가 “피자만 하지 마시고 치킨도 좀…”이라고 거든 이는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27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기업인과 ‘호프 미팅’을 했다. 왼쪽부터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하 당시 직함), 박정원 두산 회장, 금춘수 한화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문 대통령, 구본준 LG 부회장, 손경식 CJ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함영준 오뚜기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27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주요 기업인과 ‘호프 미팅’을 했다. 왼쪽부터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하 당시 직함), 박정원 두산 회장, 금춘수 한화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문 대통령, 구본준 LG 부회장, 손경식 CJ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함영준 오뚜기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번 정부에서 피자 얻어먹긴 어려워 보인다. “치킨을 쏘라”고 했던 인물은 얼마 뒤 청와대 정책실장이 됐다. 그는 전세보증금을 많이 올리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주도하고서 법 시행 이틀 전 세입자에게 ‘치킨 1만 마리 값’만큼 보증금을 올려받았다. 이 사실이 8개월 만에 들통나자 쿨하게 물러났다. 야당도 만만치 않다. 부산시장 선거를 겨냥해 “일본으로 해저터널을 뚫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국민의힘이 승리하면 ‘공중부양’하는 열차와 세트로 다음번 공약이 나올 판이다.

정치권이 허세에 골몰하는 사이 허경영 세대는 실제로 현금 살포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취업준비자 수가 18년 만에 최대치(2월 기준)를 기록했다. 지난 2월 실업급여 지급액이 1조원을 넘었다. 이젠 6개월 일하고 실업급여를 받는 사이클을 반복하는 패턴까지 생겼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내가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세 마디다.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을 남겼다. 박근혜 정부의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는 일자리 알림에 이 말을 달았다. 우리 청년이 일하기 싫어서 일자리를 마다하는 것인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년위원회를 폐지했다. 대신 일자리위원회를 만들었다. 홈페이지에는 ‘대통령이 매일 일자리 상황을 점검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일자리 상황판엔 고용률이 모두 빨간불이다. 초록색으로 치솟은 건 실업률이다. 특히 Z세대에 해당하는 ‘청년실업률’은 10.1%다.

지난 4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일자리 상황판 화면

지난 4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일자리 상황판 화면

코로나19가 이들만큼 원망스러운 사람도 없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입학식을 못했다. MT가 없고 같은 과 친구 얼굴을 잘 모른다. 졸업식은 사라졌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택해야 할까. 박영선 후보와 오세훈 후보는 Z세대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곡동 땅과 도쿄 아파트를 꺼내 들고 상대방에게 침 뱉느라 정신이 없다. 이런 선거판에서 시장감을 감별하라는 건 고문에 가깝다.

Z세대가 등장했을 때 다들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으로 주목했다. 이들이 휴대전화를 만지기 시작하자 스마트폰이 출시됐다. 한껏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주역이 실업급여와 현금 복지의 대상이 된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Z세대의 본 모습으로 돌아와야 모두에게 희망이 생긴다. 모레 선거가 그래서 중요하다.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강주안 논설위원 joo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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