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남편 위해 지순한 헌신 김영씨-"제 선택은 최상이었고 늘 행복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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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살아감에 이와 욕을 앞세우고 주거나 베풀기보다는 한사코 단 한줌이라도 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인간이 늘 지어 갖는 마음이다.
똑같이 인간인 바에야 남자와 여자가 만난들 거기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 세상 누구도 감히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시장서 약국 경영>
김영씨(여·54). 서울 신당동의 수구문 시장 안에서 올해로 17년째 「대보약국」을 경영해오고 있는 그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비록 중생을 염두에 두지는 못했을망정 몸이 성치 않은 한 지아비를 스스로 점지하고, 그후 반평생 오로지 그를 향한 인고와 지순한 사랑으로 「강선」에나 값할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왔음에서다.
8세 때 열병을 앓다가 귀를 잃고, 그로 인해 종래는 말까지 빼앗겼다는 남편 김기범씨(53)는 기회 닿을 때마다 아내를 「하늘에서 내려보내 준 천사」로 칭예해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한 여성을 통해 하느님이 베푸셨던 놀라운 사랑과 기적의 체험을 필설로 이루 다 나타낼 수가 없다』-. 최근 한국 밀알선교단 출판부에서 펴낸 『신부가 바보』란 책의 한 장에 그는 이렇게 썼다.
김영씨가 남편 김기범씨를 처음 만난 것은 30년전인 1960년 여름. 4·19를 치르고 민주당이 집권하던 7월 총선거를 보름쯤 앞두고 이었다. 모태 신앙인인 그녀가 봉사를 위해 영낙교회 농아부를 찾아갔을 때 김기범씨는 서울 선희학교(서울농아학교 전신)사범과를 졸업하고 모교교사로 봉직하면서 교회 농아교사로도 일하고 있었다. <농아자 봉사로 인연>
평상 인에게는 한낱 손짓에 지나지 않는 수화와 답답함으로 내지르는 외마디 소리만이 가득 찬 농아교실에 그녀는 일요일마다 빠짐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당시 이화여대 약학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쉽게 봉사를 자원해왔다가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다시 쉽게 모습을 감춰버리곤 하던 다른 젊은 건청인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열심히 수화를 익혔으며 성심으로 농아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어느 주일 오후 교회사무실에서 단 둘이 마주 앉았을 때 김기범씨는 그녀에게 『당신은 어째서 우리들 친묵의 세계로 찾아오셨습니까』고 물었다. 『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당신 같은 분들을 한 형제자매로 사귀고 사랑하고 싶습니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그때부터 눈에 뜨일 정도로 가까워졌고 거침없는 대화를 통해 우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김영씨는 기범씨가 평생 강원도의 오지만을 순례하는 극궁한 개척목사의 아들이며 농아가정교사·구두 닦기·신문배달 등으로 어렵게 농아학교 중고등과를 마쳤으면서도 대학에 진학해 사각모를 머리에 얹을 꿈을 키우고있음을 알았다.
도울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김영씨의 다짐과 격려에 크게 힘을 얻은 기범씨는 이듬해 봄까지 며칠씩 밤을 지새우며 전력으로 입시준비에 매달렸다.
그러나 성균관대 야간대(2부) 교육학과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을 때 그가 농아라는 사실을 확인한 창구직원은 한마디로 원서접수를 거부했다. 다툼 끝에 학생처장을 찾아갔으나 거기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선장 찾아 매달려>
김영씨는 절망으로 억새의 지경에 이른 기범씨의 손을 잡고 당시 그곳 총장으로 있던 변희용 박사(박순천 여사의 부군)를 찾아갔다. 농아 한사람을 위해 수화하는 교수를 따로 채용할 수도 없지 않느냐며 난처해하는 변 총장에게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매달렸다. 『총장님 그 문제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함께 원서를 냈어요.』 그때 두 사람이 어떤 관계냐는 변 총장의 물음에 『결혼할 사이입니다』고 서슴없이 내던졌던 김영씨의 이 한마디가 그후 두 사람의 일생을 한 끈으로 얽어매는 운명이 되었다.
두 사람은 입시를 치른 뒤 함께 합격증을 받았다. 약대를 졸업한 그녀에게는 두 번째 대학이었다. 대학 4년은 참으로 고달프고 서러움도 많은 세월이었다.
그녀는 실로 초인적인 열성으로 강의 때마다 교수들의 말씀을 필기하고 수화로 그 내용을 기범씨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분은 총명해서 모든 게 저보다 낫지만 혹간 제가 시험점수를 더위로 받을땐 어찌나 무안하고 안 됐던 지요』라고 그녀는 웃는다.
대학졸업을 1년 앞둔 63년 그녀는 영락농아인교회 창립자였던 박윤삼 목사의 주례로 기범씨와 처음 만났던 교회 그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군납사업을 하는 아버지 아래 물질적으로도 전혀 어려움 없이 자란데다 미모와 학벌을 두루 갖춘 처녀의 선택은 주위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1남2녀도 장성>
결혼 후 그녀의 말대로 『단 한차례도 큰 소리가 밖에 새나오는 법 없이』아름다운 가정을 터 닦아 온지 27년, 남편은 여전히 모교인 농아학교에서 사회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중이고, 그도 이젠 귀만 막혔을 뿐 성한 사람과 웬만한 대화는 스스럼없게 건넬 수 있을 만큼 말 길이 트여있다.
결혼 이듬해 낳은 아들 욱남(27)은 작년에 연세대의대를 나와 현재 육군 모부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고, 맏딸 향남(25)은 금년 서울대미대 서양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 작가 수업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막내 향숙(23), 그녀는 상명여대 생물학과 4년에 적을 두고있어 두 사람에게 1남2녀의 자식농사도 어언 끝이 보이고 있다.
『제 선택은 최상이었고, 그래서 저는 늘 행복합니다』고 그녀는 버릇처럼 말한다. <글 정교용·사진 최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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