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정말 감사했다" 방한 美배우가 윤여정부터 찾은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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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54)는 6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제19회 세계농아인대회 홍보대사 위촉식에서 "전 세계 농인들이 교류하는 좋은 기회의 장이기 때문에 홍보대사를 적극 수락했다"고 말했다. 제19회 세계농아인대회는 내년 7월 제주도에서 개최된다. 뉴스1

“농인 배우도 열정만 있다면 비장애인 영화인들과 똑같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인식을 바꿔주세요.”

영화 ‘코다(CODA)’로 제9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미국 배우 겸 감독 트로이 코처(54)의 말이다. 내년 7월 제주도에서 개최되는 제19회 세계농아인대회에 홍보대사로 위촉돼 방한 중인 그는 6일 내한 기자회견에서 “농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지난 3월 27일(현지시간)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남우조연상 시상자로 무대에 오른 배우 윤여정(오른쪽)이 수상자 트로이 코처가 수어로 수상소감을 하는 동안 트로피를 들고 있다. 윤여정은 그의 이름을 음성으로 호명하기 전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수어를 선보여 감동을 자아냈다. AFP=연합뉴스

윤여정이 트로피 줬던 그 배우, “정말 감사했다”

선천적 청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영화인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트로이 코처는 지난 3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코다’에서 주인공의 농인 아버지 프랭크 역을 연기해 남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배우 윤여정이 그에게 수어로 축하를 전하고, 그가 수어로 소감을 말할 수 있게 트로피를 들어줬던 장면은 국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트로이 코처는 그때 인연을 소중히 간직한 듯, 한국에 오면 하고 싶었던 일을 묻자 “아카데미상을 시상해준 윤여정 배우를 제일 먼저 뵙고 싶다”고 답했다. “윤여정 배우가 상을 들어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두 손으로 소감을 발표할 수 있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땐 시간이 부족해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는데, 기회가 주어진다면 윤여정 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 내공과 연륜을 배우고 싶습니다.”

지난 3월 27일(현지시간)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코다'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트로이 코처(왼쪽)와 상을 시상한 배우 윤여정. 코처의 손모양은 '사랑합니다'를 뜻하는 수어다. AFP=연합뉴스

제주서 열리는 세계농아인대회…“韓 정부 관심 필요”

그는 세계농아인대회 홍보대사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예고했다. 세계농아인연맹(WFD)이 4년마다 세계 각국을 돌며 개최하는 이 행사는 195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내년 7월 제주도에서 열린다. 트로이 코처는 “세계의 농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농아 관련 정책·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을 다루는 대회”라며 “한국 농인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올림픽처럼 세계 농인들이 4년에 한 번 모이는 유일한 장이다. 예산이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한국 정부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고 관심을 촉구했다.

‘위기의 시대와 인류 모두의 권리 보장’이라는 내년 행사 주제와 관련해 트로이 코처는 수어 및 농문화가 소멸돼가는 것을 위기로 꼽았다. 그는 “수어는 농인들의 모국어이기 때문에 수어가 말살되지 않도록 연구하고 보존하는 게 중요하다”며 “농교육은 결국 인권과 연결되는데 한국에서는 인공와우 수술이 아동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은 채 의사와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 문제에 대한 교육도 담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마이클 코처가 6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2023년 제19회 세계농아인대회 홍보대사 위촉식에서 위촉장을 받은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스1

“한국에서도 ‘가짜 농인’ 줄어들길”

이날 질의응답은 수어와 음성어를 오가며 3자 통역으로 이뤄졌지만, 농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는 트로이 코처의 열정은 언어 장벽을 뛰어넘어 고스란히 전달됐다. “청각장애가 신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확신한다”는 트로이 코처는 “농인들도 기회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저는 듣지는 못하지만, 볼 수는 있습니다. 남들의 두 배 이상 시각이 발달돼 있죠. 다른 사람의 연기를 열심히 관찰해 배역에 따라 어떻게 연기할지 혼자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감독으로 일할 때도 영상 편집을 농인에게 맡기는데,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는 시각적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트로이 코처가 2023년 제19회 세계농아인대회 홍보대사 위촉장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 배우들을 향해 "자신 안에 있는 열정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저는 제 생명이자 언어인 손이 잘리지 않는 한 배우 생활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그는 장애인 배우가 설 자리가 아직 많지 않고, 장애인 캐릭터마저도 비장애인에게 돌아가는 한국 영화 현실에 대해서도 변화를 촉구했다. “과거 할리우드도 장애인 역할을 비장애인에게 맡기곤 해서 직접 관계자들을 찾아가 ‘농인 역할은 당사자가 해야 한다’고 적극 건의했다”는 자신의 일화를 전하면서다.

“지금 한국은 아마 미국의 20~30년 전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산 문제도 있고, 인기나 흥행을 고려해 장애인 배역을 비장애인에게 맡기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비장애인과 농인들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영화 ‘코다’를 통해 한국 사회도 첫발을 디뎠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리우드에는 ‘가짜 농인’, 즉 비장애인이 농인 역할을 맡는 일이 많이 줄었죠. 한국에서도 농인 배우가 직접 농인 연기를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