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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64구나…안동 와인에 담긴 사연, 시 한구절 익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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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술 기행② 264청포도와인

Prologue

“안동을 상징하는 문화 콘텐트는 의외로 술입니다. 안동이 유교의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유교 공동체는 조상께 올리는 제라는 의식을 통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었지요. 제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물이 술입니다. 요즘도 안동에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제사를 드리는 종가가 열 곳이 넘습니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안동 장씨, 진성 이씨, 예안 이씨, 영천 이씨, 광산 김씨, 의성 김씨, 풍산 류씨 등등... 한두 세대 전만 해도 가문마다 제사에 올리는 술을 따로 빚었었지요. 접빈객의 문화도 여전합니다. 손님이 오시면 술을 내는 전통이 안동에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안동은 소주의 도시입니다. 소주는 고려 시대 몽골이 들여왔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몽골군이 대규모로 주둔했던 지역, 그러니까 안동·개성·제주에 증류식 소주 문화가 내려오는 게 증거이지요. 안동을 이해하려면 안동의 술을 이해해야 합니다.”

경북 안동의 한국정신문화재단 권두현(56) 관광연구지원센터장이 십수 년 전부터 해오던 말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전통 문화의 핵심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오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 전통주 시장이 최근 들어 고속 성장 중입니다. 지난해 전통주 시장이 사상 최초로 전체 주류시장의 1%를 넘었다지요(출고금액 기준). 추석 명절을 앞두고 안동의 술을 소개하는 연재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안동에는 안동소주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개발한 지 3년 밖에 안 된 와인과 국내 유일의 밀 소주는 없어서 못 팔 정도입니다. 명인이 빚는 안동소주부터 120년 묵은 막걸리까지 안동의 술 네 개를 차례로 소개합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264청포도와인을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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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술이 된 시도 있다. 안동에선 가능한 일이다. 안동에는 도산서원도 있고 하회탈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강철 같은 의지를 불살랐던 시인 이육사(1904∼1944)도 있다.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육사의 시 첫 두 행을 옮겨 적는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시구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그러니까 낙동강 내려다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포도나무 심고 와인까지 빚게 된 이야기의 맨앞에는 저 유명한 시 ‘청포도’가 있었다. 이 시구 덕분에 토계 마을에는 주저리주저리 또 하나의 전설이 열렸다.

이육사 & 264

안동의 '264청포도와인'은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에서 시작된 와인이다. 세상에는 술이 된 시도 있다.

안동의 '264청포도와인'은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에서 시작된 와인이다. 세상에는 술이 된 시도 있다.

우선 문학 공부부터 하자. 이육사는 워낙 국어 시험에서 자주 출제됐던 시인이어서 ‘청포도’ 말고도 생각나는 작품이 꽤 있다. 이를테면 아래 시구들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광야’ 부분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 부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방울 내리잖은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꽃’ 부분

육사는 안동을 대표하는 명문가 출신이다. 안동 진성 이씨, 그러니까 퇴계 이황(1501~1570)의 14대손이다. 육사가 태어나고 자라난 마을 주변에 퇴계종택도 있고 도산서원도 있다. 이육사문학관, 포도밭, 와이너리도 다 근처에 자리한다. 육사의 본명은 원록이다. 육사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배달사건에 연루돼 1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때 수감번호가 ‘264’였고, 그 수감번호를 시인은 필명으로 썼다. 육사의 고향에서 만든 와인에 ‘264’란 숫자를 사용한 건 매우 문학적인 작명이었다.

'264청포도와인'의 상자. 상자에 이육사 시의 구절을 옮겨 적었다.

'264청포도와인'의 상자. 상자에 이육사 시의 구절을 옮겨 적었다.

앞서 인용한 시구를 다시 보자. 굵은 표시를 한 시구는 와인 상자에 써놓은 구절들이다. ‘264청포도와인’은 세 종류로 모두 화이트 와인이다. 가장 당도가 낮은 와인의 이름은 ‘광야’다. ‘광야’ 상자에는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구절을 옮겨 적었다. 가장 당도가 높은 와인은 ‘꽃’이라 이름 지었는데, ‘비 한 방울 내리잖은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는 시구로 장식했다. 13.5도로 가장 도수가 높은 와인의 이름은 ‘절정’이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보인다. 그러니까 ‘264청포도와인’은 시인의 이름과 와인을 낳게 된 작품과 주요 작품의 시구로 구성된다. 와인 상표와 디자인을 이육사문학관이 맡았기 때문에 이렇게 문학적인 술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와인 매출의 5%가 이육사문학관에 돌아간다.

이육사문학관에 있느 이육사 시인 동상과 '절정' 시비.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육사문학관에 있느 이육사 시인 동상과 '절정' 시비.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육사가 노래한 청포도가 실제 청포도가 아니라 풋포도라고 주장하는 문학평론가도 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구절 때문이다. 아직 덜 익은 풋포도이어야 포도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시인의 의도와 맞는다는 해석이다. 문학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시방 시인의 고향에선 진짜 청포도를 키워 술을 빚는다. 이준용(73) 안동시 문화관광해설사는 “도산면에 대규모 포도밭은 없었으나 마을마다 포도나무 몇 그루는 있었다”며 “청포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참, 시에서 ‘내 고장 칠월’은 지금의 8월을 이른다. 그 시절엔 음력이 기준이었다.

청포도 & 와인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의 이동수 대표. 진성 이씨로 이육사 시인의 조카뻘 된다.

'264청포도와인' 와이너리의 이동수 대표. 진성 이씨로 이육사 시인의 조카뻘 된다.

‘264청포도와인’은 2017년 안동시 농업기술센터의 지역특화사업에서 비롯됐다. 농촌진흥청이 포도 와인으로 개발한 ‘청수’라는 청포도 품종의 보급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프로젝트에 이동수(61)씨가 와이너리 운영자로 결합했다. 도산서원 근처에서 수박 농사짓던 이씨의 인생은 2017년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저도 진성 이씨 집안입니다. 이육사 시인이 제 아재뻘 됩니다. 와인 만들 사람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큰맘 먹고 결심했습니다. 와인을 전혀 몰랐었지요.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경북 영천에 있는 와인학교 과정도 세 번 반복해 들었습니다. 소믈리에 자격증도 땄습니다.”

'264청포도와인'에는 농촌진흥청에서 포도 와인으로 개발한 '청수' 품종이 들어간다. 와이너리 근처 포도밭에서 수확을 앞둔 청포도를 촬영했다.

'264청포도와인'에는 농촌진흥청에서 포도 와인으로 개발한 '청수' 품종이 들어간다. 와이너리 근처 포도밭에서 수확을 앞둔 청포도를 촬영했다.

‘264청포도와인’은 2019년 생산을 시작했다. 해마다 포도 생산량이 늘었고, 덩달아 와인 생산량도 늘었다. 지난해에는 포도 21톤을 수확해 750㎖ 기준 2만1000병을 생산했고, 올해는 28톤을 수확해 같은 기준 2만6000병을 생산할 예정이다. 포도는 와이너리 주변 10개 농가가 재배해 납품한다. 포도밭 면적은 3만㎡. 10개 농가가 거둔 포도 전량이 와이너리에 공급되고, 와이너리는 10개 농가의 포도만으로 와인을 빚는다.

‘264청포도와인’ 제조 방법은 다음과 같다. 농가에서 수확한 포도를 껍질째 분쇄한다. 그리고 10일간 1차 발효한다. 이어 껍질을 제거한 뒤 다시 35일간 2차 발효한다. 발효를 마친 와인은 이후 최소 6개월간 숙성한다. 하여 올 8월에 수확한 와인은 내년 6월이나 돼야 맛볼 수 있다.

“기대보다 인기가 좋아 재고가 없습니다. 와인은 오래 묵을수록 향과 맛이 더 좋아진다지만, 장기간 숙성을 위해 남겨둘 와인이 없습니다. 더 만들고 싶어도 포도가 부족하고, 발효시설도 이미 한계까지 왔습니다.”

세 가지 종류의 ‘264청포도와인’ 중 ‘절정’의 인기가 제일 높다. 13.5도로 ‘264청포도와인’ 중에서 도수는 제일 높으나 당도는 중간 정도다. 올해 대한민국 주류대상 한국 와인 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와인 초보자에게 ‘264청포도와인’ 세 종류의 맛을 감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대신 간단한 리뷰는 쓸 수 있다. 처음엔 단맛이 강했는데 음미할수록 쓴맛과 떫은맛이 올라왔다. 서서히 균형이 잡히는 느낌이었는데 “처음에 껍질째 발효했기 때문”이라고 이동수 대표가 알려줬다. 산뜻한 포도 향이 한동안 입안을 감돌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264청포도와인

'264청포도와인'의 한 종류인 '절정'. 13,5도 화이트 와인으로 세 종류의 '264청포도와인' 중에서 제일 인기가 높다.

'264청포도와인'의 한 종류인 '절정'. 13,5도 화이트 와인으로 세 종류의 '264청포도와인' 중에서 제일 인기가 높다.

‘264청포도와인’은 생산량이 많지 않다. 서울 대형 마트에서 구할 수 없다. 대신 서울의 몇몇 식당이 ‘264청포도와인’을 판매한다. 안동시 도산면 와이너리에 가면 시음도 할 수 있고 와인을 살 수 있다. 세 종류 와인 모두 750㎖와 375㎖ 병이 있다. ‘절정’ 750㎖가 3만원 정도 한다. 온라인 구매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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