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20일 만에 관객 수 600만 명을 기록한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유난히 눈에 띈 역할이 있었다. 조선에 항복한 왜군 장수 ‘준사’라는 인물이다. 일본 상투 촌마게(丁髷)를 틀어 정수리까지 훤히 드러낸 일본 장수가 위기에 빠진 조선을 도와 왜군과 싸우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통쾌했다. 이 장면에서, 그러니까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돌변해 왜군에 칼을 휘두르는 대목에서 사실을 의심한 적 있었다면 오해를 거두시길.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상륙한 왜군 중에서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들은 실제로 있었다. 특히 영화에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실존 인물은 평생 조선을 위해 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이품 벼슬을 받았다. 대구에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 사당이 있는 마을에 후손이 모여 산다.
사야가 vs 김충선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대구에서 남쪽으로 30번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어귀만 막으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될 것 같은 천혜의 요새 같은 지형이다. 마을 초입에서 정면에 보이는 산이 우미산(747m)이고, 오른쪽의 산이 삼정산(566m)이다. 왼쪽에 늘어선 봉화산(473m)과 삼성산(668m) 너머가 청도 땅이라고 했다.
녹동서원은 볕 잘 듣는 삼정산 남쪽 아랫자락에 있었다. 녹동서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우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1571~1642) 장군을 모시는 서원이다. 귀화 이전 그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로 전해진다. 녹동서원 옆 한일우호관에서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손수자(67)씨를 만났다.
“조선에 항복한 왜군을 항왜(降倭)라 하는데, 거의 모든 항왜가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았어요. 김충선 장군이 거의 유일한 예외입니다. 귀화 사유부터 전공(戰功)까지 조선에서의 50년 기록이 전해오니까요. 영화 초반에 이순신 장군이 부하를 구하려다 부상당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때 준사가 의(義)를 말합니다. 김충선 장군이 바로 그 의와 예 때문에 조선에 귀화하셨어요.”
해설사의 설명처럼 사야가는 조선의 예의에 감동해 귀화를 결심한다. 종군 7일 만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피란길에 오른 조선인이 전쟁통에도 의복을 갖춰 입고 노모를 업고 아이들을 걸리고 있었다. 전란 중에도 의관 문물이 일본에서 들었던 바와 같았다”며 항복의 뜻을 밝혔다(사야가가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하며 건넨 ‘강화서’에서 인용)’. 무인이자 문인이었던 사야가는 평소 고대 중국 하은주 시대를 흠모했다고 한다. 하은주 시대는 인간이 예와 의를 지키며 사는 태평성대의 시절을 이르는데, 조선에서 그 이상향의 일단을 발견했다는 게 사야가가 밝힌 귀화 이유다. 사야가는 훗날 자신의 호를 ‘모하당(慕夏堂)’이라 지었다. 중국 하나라를 흠모한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불의(不義)에 맞서는 의(義)의 싸움”이라고 여러 번 말한다.
조선에 투항한 사야가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자신의 조총부대 500명과 함께 귀화한 사야가는 조선에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전수했으며, 울산·경주·영주 등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영화에서 준사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서 싸우는 것처럼, 사야가도 육지에서 싸웠다. 사야가는 실제로 이순신 장군과도 교류했다. 조총과 화포, 화약 만드는 법에 관하여 이순신과 주고받았던 서신이 전해온다. 사야가가 왜군에 함락됐던 성 18개를 되찾아오자, 선조는 정이품 자헌대부 관직과 김해 김씨 성과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왜란 뒤에도 그는 북방에 나가 여진족을 소탕했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에서도 활약했다.
우록리 녹동서원
“김충선 장군을 시조로 하는 사성 김해 김씨는 현재 18대손까지 내려옵니다. 전국에 약 7500명의 후손이 살고 있고요. 우록리에는 87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우록리는 사성 김해 김씨 집성촌입니다.”
사성 김해 김씨 김상보(74) 종친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김충선 장군의 12대손이다. 사성(賜姓)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김해 김씨 가문과 구별하기 위해 사성 김해 김씨라고 따로 부른단다. 지명을 따 ‘우록 김씨’라고도 한다. 우록(友鹿)은 ‘사슴을 벗삼는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이후 거처를 찾던 김충선 장군이 여기 산자락에서 사슴이나 벗 삼고 살겠다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에 김충선 장군을 기리는 녹동서원과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녹동사가 있다. 서원 뒤쪽 산자락에는 장군의 묘소가, 서원 서쪽에는 생가가 있다. 서원 옆에 2012년 건립한 한일우호관에선 장군의 유품과 기록이 전시 중이다. 김 회장은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해마다 수학여행단을 비롯해 일본인 2000∼3000명이 방문했었다”며 “일본에서도 김충선 장군을 배신자가 아니라 의인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그를 이해한다는 건 사실일까. 1960년대까지 일본에선 김충선 장군이 조선이 만든 허구 인물이라고 주장했었다. 일본에서 반전이 일어난 건, 1970년대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가 녹동서원을 방문한 뒤 펴낸 책에서 장군을 알린 뒤부터다. 임진왜란 400주년이자 김충선 장군 귀화 400주년이던 1992년에는 일본 NHK 방송이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 사야가 연구단체들이 설립되었고, 1998년 한국과 일본 교과서에 김충선 장군의 이야기가 실렸다.
평소에는 잠가놓는다는 서원을 김 회장이 열어줬다. 서원을 지나 장군 영정을 모신 녹동사로 걸음을 옮겼다. 1960년대 남자 후손 27명의 사진을 수집해 제작한 영정이라고 했다. 김 회장이 “영정이 나랑 비슷하지 않으냐”며 웃었다. 정말로 비슷해 보였다.
김충선 장군의 일본 기록은 알려진 바가 없다. 정확한 출신지도 모르고, 사야가도 가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일본에 두고 온 가족이 보복을 당할까 봐 입을 다문 듯하다. 그런데 정말 의를 좇아 조국과 가족에 등을 돌리는 건 가능한 삶일까. 사사로운 이해에 안달복달하는 우리네에겐 헤아리기 버거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