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 프로기질 심었다"|LG태풍 몰고온 백인천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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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한판의 바둑에 목숨을 걸고 둔다』는 천재기사 조치훈과『야구만을 생각하고 살라』고 일갈하는 백인천 LG감독의 말속에는 승부사만이 지닌 비장감이 서려있다.
승부사의 세계, 즉 프로의 세계에서 패배란 죽음과 같은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야구계에는 7년만에 그라운드에 복귀, 만년 하위권을 맴돌던 LG트윈스(전 MBC청룡)팀 1년만에 최정상으로 탈바꿈시킨 백인천 감독에 대한 찬사열풍으로 뜨겁다.
처음엔『설마』하던 각 팀 감독들도 그의 투철한 승부 근성과 뛰어난 용병술에 감탄하게 됐고 한국 시리즈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수긍하고 있다.
-경기도중 덕아웃에서 큰 소리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이유는.
▲선수들은 경기장에 나서려면 평소 훈련해온 것들을 순간적으로 잊어먹는 수가 많다. 이것을 포착할 때마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소리를 지르거나 제스처를 쓰게 된다. 순간적인 집중력, 이른바 기합을 넣어주기 위해서다.
-올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를 치르면서 느낀 한국 프로 야구의 수준은.
▲초창기보다 많이 늘었다. 특히 선동렬 한 대화 김성한(이상 해태) 유중일 강기웅(이상 삼성) 김상훈, 노찬엽 등은 일본프로에 갖다놔도 한 몫 할 수 있는 1급 선수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수준을 평가한다면 일본프로야구의 1.5군 정도의 실력으로 보고 싶다.
한국프로야구의 올스타팀이 일본의 1개 구단과 10연전을 벌인다면 3∼4승 정도 올릴 수 있는 수준이며 앞으로 5년 후면 일본과 엇비슷한 전력을 갖출 것으로 본다.
-한국시리즈에서 4승으로 쉽게 승리한 비결은.
▲우선 정신력에서 LG선수들이 삼성을 압도했다. 당시 야구계의 평은 한달간 경기를 치르지 않아 LG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 4-0으로 이겨 예상이 틀렸음을 증명해 주자는 오기가 드높았다. 둘째로 선발투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했고 삼성의 사인을 대부분 훔쳐낼 수 있었다. 우리가 잘했지만 삼성의 실수가 많았던 것 같다.
-치고 달리기 작전을 너무 남용한다는 비판이 있는데….
▲경기에 따라 그날의 승부처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감독은 작전을 걸게 되는데 타자들 중에는 오히려 치고 달리기를 편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만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또 소극적인 타자들에겐 적극성을 심어주게 되고 그게 치는 타자에겐 스윙 폭을 짧게 유도할 수 있는 강점도 있는 것이다.
-프로야구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첫째 선수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매력이란 실력일 수도 있고 투철한 정신력이나 인격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한국프로야구도 지난 9년간 나름대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따라서 선수들의 안목·기량도 높아져 정통프로 출신이 아니면 이들을 이끌기 곤란할 것이다. 나의 경우도 일본에서 선수시절 체험한 기술·훈련방법 등을 선수들에게 가르쳤고 선수들이 직접 실전에서 통하게 되니까 감독을 신뢰하게 됐다.
이론과 실제가 일치해야 선수가 따라온다.
LG는 올해부터 1, 2군 합동 코치세미나를 실시, 부문별 이론을 통일시켜 나갈 계획이다.
-평소『야구만을 생각하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프로는 자신의 직업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전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따라서 승부에 사는 프로야구 선수가 야구만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타 구단 선수를 평해서 안됐지만 박노준(OB)같은 선수는 선천적인 센스를 갖고 있으면서도 야구장을 떠나면 야구를 잊고 전념치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항상 야구에만 전념해야 훌륭한 프로선수가 될 수 있다.
-시즌 중 가장 껄끄러웠던 팀은.
▲서울의 라이벌인 OB였다. 최하위 팀이 껄끄러웠다면 농담으로 넘길지 모르나 OB는 LG와 싸우면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LG선수들은 OB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정신상대로 고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중들의 관전매너에 대해 느낀 점은.
▲일본에서도 60년대까지 병을 던지는 등 간혹 소란 사태가 있었으나 70년대에는 없어졌다.
1년간 각 구장을 돌아보니 광주 팬들의 매너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시즌 막판 고비에서 LG가 해태에 3연승, 해태의 상위권 진출이 어려워져 경기장 소란사태를 걱정했는데 일부 팬들은『백 감독이 최고』라며 박수까지 쳐줬다.
초창기와는 1백80도 달라진 광주 팬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관중들의 소란 행위는 구장시설의 노후화에도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관중들이 야구장에 와서 먹고 즐길 수 있는 좋은 음식·시설이 부족하다보니 자연 술을 마시게되고 경기의 승패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좋은 경기장의 확보가 시급하다. <권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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