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밭을 걷는 듯한 분단 현실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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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남북 당국자간의 고위급 회담이 개최됨과 때를 같이하여 체육·문화부문의 남북 민간인 교류가 진행됨으로써 냉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땀의 얼어붙은 분단체제도 세계적 변화의 훈풍 속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햇볕이 들면 잠시 녹았다가 찬바람이 불면 다시 얼어붙는 일시적 해빙이 아니고 진정으로 민족의 하나됨을 지향하는 근본적 변화의 첫걸음이 되려면 분단의 역사적 원인과 구조에 대한 냉정하고도 과학적인 성찰이 끊임없이 뒤따라야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분단의 극복은 남북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과정이 아니라 절대 다수 민중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삶을 실현하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금년 『살아 있는 무덤』『노역장 이야기』등의 문제작을 잇따라 내놓음으로써 신예작가 김하기는 분단 모순의 최심층부에 파묻혀 있던 가장 침통한 비극의 하나를 뛰어난 문학적 형상 속에 담아 우리 시대의 통일 운동이 어떤 범위에서 어떤 성격으로 전개되어야 할까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20년, 30년이 넘는 미전향 장기수들의 죽음 같은 삶이 결코 화석화된 역사의 퇴적층이 아니고 외세의 지배와 파쇼적 폭압을 내용으로 하는 분단체제와의 지속적인 싸움의 한 현상임을 그의 소설은 놀라운 감동 속에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 『해미』(한길문학 10월호)에서도 김하기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분단현실의 심장부에 접근한다. 60년대말 네 사람의 북쪽 공작원이 비바람 몰아치는 야음을 뚫고 동해안으로 침투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발각되어 총격을 받는다.
셋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나머지 한사람 현석은 부상하여 동굴에 숨었다가 자신의 고향집을 찾아 숨어든다. 어머니와 동생 항석은 간절히 자수를 권유하나 그는 완강히 거부한 채 일제 때 징용을 피하기 위해 만든 비밀 장소에서 북쪽의 구원을 기다리며 5년간 지하 생활을 한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항석의 아들인 고등학생 형우에게 발견되어 자신의 내력을 털어놓는 것이다. 며칠후 그는 해미(짙은 안개)낀 바다쪽으로 사라져 자폭한다. 이런 사실들이 결국은 모두 들통이 나서 항석의 가족과 친척들은 간첩단으로 체포된다. 항석과 외종인 김상규는 사형이 되고 형우는 10년형을 받는다. 이 소설은 형을 마치고 귀향하는 형우의 시점에서 회상의 형식으로 이상과 같은 한 가족의 파멸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는 혈연적 공동체의 역사와 가능성을 가진 것이 우리 민족이라 할 때, 이 작품은 오늘의 분단 현실이 그러한 민족적 입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은 그러한 민족적 입장에 다가서는 것이 마치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치명적 타격을 자초하는 지뢰밭을 걷는 위험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엄중한 현실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통일운동은 감격과 환희를 동반하는 일대 정서적 고양의 체험일 뿐만 아니라 시한 폭탄에서 뇌관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고도의 기술과 조심성을 요하는 싸늘한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 『해미』는 이와 더불어 몇가지 반성점을 제기한다. 이 작품은 소설적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하여 작위성을 느끼게 하며 많은 부분에서 감상주의를 드러낸다. 무대가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을 벗어났을 때 작가의 미숙성이 그대로 작품의 결함으로 현재화되는 것 같다. 체험이라는 자산이 질곡으로 화하는 것을 막아야 할 시점에 이제 김하기는 와 있다.
이 믿음직한 신진 작가의 새로운 비약을 촉구하는 바다.【염무웅<문학평론가·영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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