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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포킴, 지상에 낙원은 없었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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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서울 삼청동 거리를 지나다 보면 꼭 지나게 되는 단아한 형태의 한옥 건물이 있습니다. 밖으로 간판도 눈에 띄지 않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가 아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건물의 정체를 모르기 십상입니다. 최욱 건축가가 설계한 학고재(대표 우찬규)갤러리입니다.

문을 밀고 들어가면 바깥 거리와 달리 고즈넉한 전시장이 펼쳐집니다. 현재 이곳에선 뉴욕에서 활동했던 한인화가 포킴(본명 김보현, 1917~2014)을 소개하는 전시 ‘지상의 낙원을 그리다’(12일까지)가 열리고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가 문 하나 열고 들어갔을 뿐인데, 이국땅에서 작업하다가 세상을 떠난 한 작가의 그림 23점과 느닷없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꽃과 새, 유영하는 물고기, 리듬감 있는 붓질, 강렬하고 투명한 색채감이 남다른 캔버스엔 평화로운 낙원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포킴, 날아가는 생각, 2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2.88x152.4㎝. [사진 학고재]

포킴, 날아가는 생각, 200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2.88x152.4㎝. [사진 학고재]

그림은 이토록 천진난만한데, 이 작가가 생전에 고국에서 겪은 고생담이 기막힙니다. 일제강점기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엔 광주 주둔 사령관 딸에게 미술 개인 지도를 했다가 반동분자로 몰려 전기고문을 당했습니다. 또 미군정이 물러난 뒤엔 조선대 미대 교수 시절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가 공산주의를 가르친다며 국군과 경찰 손에 목포구치소로 끌려갔습니다. 구치소에서 나왔을 땐 6·25 발발로 목포가 다시 인민군 세상이었습니다.

그는 95세 때 한 인터뷰에서 “항상 경찰에 대한 공포감이 있었다. 형사들을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한국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글에 “작가가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 오히려 환상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에게 고향 한국은 고통과 그리움의 존재였습니다. 뉴욕에서 살며 18마리의 앵무새와 수천 종의 화분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작가는 캔버스 안에 활기 넘치고 자유로운 자신의 낙원을 지었습니다.

미국 큐레이터자 평론가인 바버라 런던은 “그의 선명한 색채는 그의 고국에서 비롯된다. 마치 한국의 무당을 연상시킨다”고 썼습니다. 이국 평론가는 그의 그림에서 동양 정원의 흔적과 한국 채색화의 DNA를 보았습니다.

지금 삼청동엔 포킴 전시 외에도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갤러리 현대에선 ‘한국 전위미술 1세대’ 이승택 개인전이 한창이고, 금호미술관 ‘영 아티스트’ 2부 전시가 19일까지 이어집니다. 국제갤러리에서 9일부터 유영국 20주기 회고전, PKM갤러리에선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가 15일 개막합니다. 아름다운 6월, 지금이야말로 우리 곁의 뮤지엄 로드를 만끽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