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빨리 커 어른책이 되고 싶어요"…'이름없는 작은 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아주 짧은 이야기책 한 권이 여기 있다. 책 속의 글은 "옛날 옛적에…"와 "끝"이라는 단 두 줄이다. 이 이야기책의 소원은 빨리 커서 번듯한 꼴을 갖춘 어른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이 주인공이라니. 소설은 첫 쪽부터 범상치 않다. 교정.번역.편집.판매.저술 등 출판에 관한 모든 분야를 섭렵했다는 작가 호세 안토니아 미얀이 쓴 이 짧은 소설의 주제는 책을 통한 세상보기다.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 같은 이야기책은 가능성 많은 어린이를, 이야기책을 성공하라고 독려하는 부모 책들은 인간의 부모를 상징한다.

배경은 어느 도서관. 이야기책은 유명한 과학잡지를 엄마로, 멋진 시민법전 시리즈를 아빠로 두었다. 아빠는 언제나 다른 심각한 책들과 회의를 하고, 엄마는 밤마다 박식한 책들이나 노벨상 수상작들과 저녁을 먹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다. 이 잘 나가는 부모의 걱정거리는 이야기책을 어떻게 하면 자랄 수 있게 하는가다. 책꽂이를 바꿔줘야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줘 자라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다. 물론 이야기책도 여느 어린이들처럼 학교에 간다. 차근차근 문법과 맞춤법을 공부해야 오타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책에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책장은 낡았지만 가죽장정으로 돼 있다. 특히 할머니는 "책장을 더럽히지 마라, 표지를 잘 펴라"고 주문하는 잔소리꾼이다. 그래도 손자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 시집이 이야기책에게 시인이 될 자질이 있다고 하자, 할머니는 정색하며 "우리 집안은 산문 출신이라 이야기책은 나중에 훌륭한 소설이 돼 상도 탈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이야기책은 반찬 냄새 풍기는 가정부 요리책 손에 끌려 집으로 가다가 모험을 하게 된다. 성장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장 위칸의 백과사전을 찾아나선 것. 도중에 사람들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소외된 낡은(늙은) 책들, 자기 존재를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복사본 등을 만난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이야기책을 할아버지는 "너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뭐든지 될 수 있다"고 다독여 준다.

누구나 한때 이야기책 같은 시절이 있지 않을까. 빨리 크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현재의 자신이 영 못마땅했던 시절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모른다. 무엇이 되고난 뒤보다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작가는 한 토막 콩트 같은 소설로 이런 삶의 지혜를 이야기해주려 한다. 그리고 그 속닥거림이 여간 재미난 게 아니다.

홍수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