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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비극과 울부짖는 창의 찰떡 궁합, 깊은 울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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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19면

창극 ‘리어’의 주역 김준수

창극 ‘리어’의 주역 김준수

국립창극단이 2010년부터 외쳐온 ‘창극 대중화’가 마침내 실현됐다. 지난해 JTBC ‘풍류대장’ 등 국악 크로스오버 오디션에서 김준수(사진), 유태평양 등 창극단원들이 인지도를 높인 덕인지, 티켓 오픈과 동시에 전석매진됐다는 신작 ‘리어’(3월30일까지 국립극장)의 객석은 사상 유례없는 만원사례였다.

창극과 셰익스피어와의 만남이 특별한 건 아니다. 2010년부터 국립창극단은 ‘핫하다’는 외부 예술가들을 기용해 숱한 급진적 실험을 했다. 그리스 비극부터 중국 경극, 그림 동화, 낯선 창작극까지, 창극의 소재에 금기는 없었다. 어설픈 사대주의는 진작 벗어났지만, 팝송 번안곡처럼 겉도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리어’는 서양 고전과 한국 전통의 진정한 찰떡궁합을 보여줬다. 원작 ‘리어왕’이 마치 처음부터 창극이었다는 듯, 각색부터 의상까지 조금도 껄끄러움이 없었다. 오히려 춘향가나 흥보가처럼 현대적 가치관과 충돌 지점을 내포한 판소리 5바탕보다 인간 본성에 확대경을 댄 셰익스피어 원전이 내용적으로도 소화가 편했다.

‘전통 현대화’ 프레임 없이도 충분히 울림 있는 무대였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중에서도 가장 길고 지루한 작품으로 꼽히지만, 버라이어티한 우리 소리와 음악을 덧입고 박진감을 장착하자 뻔한 이야기에 몰입도가 수직 상승했다. 인간 삶은 눈물바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물의 무대에서 통탄할 슬픔을 토해내는 셰익스피어 비극과 창의 한서린 울부짖음은 최상의 케미스트리를 빚어냈다.

창작진의 ‘창극 어벤저스’다운 면모가 돋보였다. 배삼식 작가의 밀도있는 대본을 바탕으로 한승석 음악감독은 작창의 정석을 보여줬고, 작곡가 정재일의 클래식한 선율은 웅장한 타악 리듬에 장엄미를 더해줬다. 이태섭 디자이너의 상징적, 철학적인 무대 안에서 현대무용가인 정영두 연출이 코러스의 합창과 무브먼트로 빚어낸 스펙터클 전투씬을 비롯한 조형미 넘치는 미장센도 창극의 미적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티켓파워는 결국 배우의 몫. 노인 역이 과연 어울릴까 싶었던 ‘풍류대장’의 스타 김준수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히어로로서 최고의 존재감을 과시했고, 에드먼드 역의 신예 김수인의 활약은 창극계의 밝은 미래를 예감하게 했다. 낯선 실험도, 의무적 새로움도 없었지만 ‘리어’는 꽤 충격적인 공연이었다. 지금 시대에 공연예술이란 것이 왜 필요한지, 전통을 통해 웅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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