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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커먼 바닷물 마을 곳곳에 폐가|온산공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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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팔·다리가 쑤시고 저립니다. 눈·코·목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공해 공단」온산 공단 주민들의 한결같은 호소다. 어린아이·노인 할 것 없이 공단이 생기 고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증세에 시달려 오고 있다.
거대한 공장 굴뚝에서 무차별 내뿜는 희뿌연 매연과 쉴새없이 쏟아 붓는 폐수로 사시사철 유독가스와 심한 악취에 싸여 온산공단 주변은 이제 사람도, 바다도, 땅도 깊은 공해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농작물은 물론 나무조차 말라죽고 미역·우렁쉥이 등 수산물도 집단 폐 사하고 있으며 사람까지 시름시름 병들어 가는 죽음의 당으로 변한 지 오래다.

<흡사 죽음의 땅>
이 때문에 온산공단 주변 16개 부락 l만5천여 명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공해에 빼앗기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20일 오전 경남 울주군 온산 면 목도부락. 이주대상 3백24가구 중 70%정도가 이미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떠난 마을은 인근 쌍용정유·대한유화·경기화학 등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곳곳에 헐다 만 집과 폐가가 을씨년스럽게 방치돼 있어 공해로 인해 폐쇄되고 있는 마을임을 실감케 했다.
떠난 사람들이 버리고 간 낡은 가재도구들이 길거리에 나뒹굴고 빈집과 골목길은 온통 잡초만 무성해 황량함을 더해 주었다.
인근 공장에서 쏟아 버린 폐수로 폐쇄된 마을 앞 어장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지난 10일로 폐교된 목도 국민학교 교정에도 공해에 견디지 못해 말라죽은 나무와 휴지 등 쓰레기만 이리지리 흩어져 있을 뿐 인적은 끊겼다.『저 공장들 때문입니다. 밤낮없이「독한 연기」를 뿜어 대니 농작물도 말라죽는 판에 사람인들 견딜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을에서 3대째 미역 어장을 하며 살아오다 정부에서 이주 보상비로 준 1천만원을 받고 이날 이사 짐을 꾸리던 김 모씨(54)는『공해마을에서 벗어난다는 홀가분함보다 고향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함께 이 돈으로 다섯 식구가 낯선 곳에서 무엇을 해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했다.
온산만 일대 5백23만5천 평에 자리잡은 온산공단은 74년 비철금속단지로 지정 받아 현재 중금속 가공·제련 및 정유·화학펄프 제조업체 등 44개 업체가 가동중이고 7개 업체가 건설중이다.

<이주할 곳도 막막>
애초부터 주민이주 등 오염방지책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중금속·중화학 공장들이 들어선 온산 지역은 78년 고려아연의 첫 가동을 시작으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79년7월 풍산금속이 시험 가동하면서 쏟아 낸 세척 수(압연 류)와 같은 해 l2월동해 펄프에서 시행 가동하면서 4시간이나 쏟아 부은 세척 수(염산 류)로 마을 앞 바다 공동어장의 성게·미역·전복 등 이 집단 폐 사해 버렸다.
그런가 하면 이들 공장에서 내뿜는 아황산가스 등 매연으로 주민들이 중독 돼 쓰러지거나 구토·두통 등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 수년간 온산공단 주민들은 해마다 4∼5회씩의 어장집단 폐 사 등 재산손실과 공해병으로 입주업체와 보상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을 빚어 왔다.
『온산만 일대는 공단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미역·우렁쉥이·전복 등 풍부한 수산물로 어민들의 가구 당 소득이 높았고 풍광 또한 뛰어난 평화로운 어촌이었습니다』
구봉원 온산공단 공해 대책 협의회 의장은『그러나 공장 가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황폐화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동해 펄프 옆 우봉리 마을. 마을 근처에 들어서자마자 달걀 썩는 냄새와 같은 심한 구린내가 진동했다.

<풀조차 시들시들>
『우리는 이 냄새를 10여 년간 맡아 왔어요. 이건 약과죠. 밤10시만 넘어 보세요. 근처 공장들에서 얼마나 지독하게 매연을 뿜어 대는지 방문을 꼭꼭 잠그고 있어도 눈·코가 따갑고 머리까지 아파 밤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박 모씨(52·여)는『1년 내내 창문 한번 못 열고 산다』며『5∼6년 전부터 뼈마디가 쑤시고 허리에 통증이 심해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원래 이 지역은 전국에서도 이름난 미역 특산지 이었어요.』
정 모씨(43)는 그런데 지금은 미역을 양식하면 아예 녹아 없어지고 홍합·전복 등도 모두 죽어 버린다』며 텅 빈 자신의 어장을 가리켰다.
실제로 마을 앞 바다는 푸른빛을 잃고 간장 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바위에는 이끼조차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온산에서 가장 공해피해가 심하다는 대 정리 고려아연 옆 마을은 시커멓게 타 죽은 나무들이 앙상하게 둘러서 있고 풀조차 벌겋게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1백가구 중 반 이상이 떠나 버린 이 마을에도 인근 공장에서 날아오는 유독가스로 눈·코가 따가워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주 보상비로 몇 푼 받았지만 네 식구 모두 기관지·팔·다리·허리가 아파 병원 비로 다 써 버렸어요. 이곳을 떠나려고 해도 돈이 없어 오도 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 이모씨(45·여)는『병원에 가도 공해병이라는 진단이 나오지 않아 치료비도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며 울먹였다.
지난85년 온산공단 내 이율·당월·달포 등 7개 부락 주민들이 팔다리가 저리고 수족이 마비되는「이타이이타이병」증세로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가 있은 후 당국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8백여 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정밀 역학검사를 벌었다.

<공해병 입씨름만>
그러나 공해병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와 온산주민들의 이 같은 증세는 아직까지 정확한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채 그냥「온산병」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학자들은『농·수산물의 작황, 주민증세로 보아 감각적으로 느끼는 오염정도는 심각했다』고 밝히고『업체 등의 비 협조로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털어놓았었다.
『우리는 공해병 연구의 실험동물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에서 나와 조사한답시고 법석을 떨고「맞다, 아니다」로 입씨름을 벌이는 사이에 우리의 병은 더 깊어 가고 있습니다.』
달포리 주민 유 모씨(58)는『공단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이런 증세가 있다는 깃이 공해병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인근 공장의 한 관계자는『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도 잘못 새어나온 유독가스나 매연 등에 질식돼 쓰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하고『매연으로 인해 공장기계 부식도 심해 고장이 잦거나 컴퓨터 등 정밀기계도 6개월이 못돼 고장나 버린다』고 했다.
환경 전문가들은 온산공단의 공해를 대기·토양·바다·인체·생태계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복합 공해」로 규정한다.
환경 영향을 무시한 개발 우 선의 성장위주 정책, 공해방지 시설 투자에는 인색하면서도 생산에만 열을 올리는 기업들의 안일한 사고방식이 낳은 오늘의「온산병」은 바로 우리의 병이자 치부이기도 하다. <글=정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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